[이병희 탄생 100년] ① 수원은 어떻게 이병희를 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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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서 태어나 수원서 학창시절 … 38세 첫 금배지정치적 부침에도 수원에서 7선, 30여 년 이어진 인연중앙무대 누빈 정치인, 학창시절부터 키워준 수원

편집자주 -

2026년은 백웅 이병희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수원에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경기도청 이전과 수원화성 복원, 기업 유치 등 수원이 성장하는 과정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그 뒤에는 중앙정부와 기업, 공직사회와 지역을 연결했던 그의 헌신이 있었다. 수원일보는 탄생 100년을 맞은 백웅 이병희 선생과 수원이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본다.

백웅 이병희
백웅 이병희 선생

백웅 이병희는 수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강하게 ‘수원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926년 8월 1일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이병희와 수원의 인연은 정치보다 먼저 시작됐다. 그는 1946년 삼일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49년 육사 8기로 졸업한 뒤 군인의 길을 걸었다. 군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곳은 수원이었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38세였던 이병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수원에 출마했다. 1만5493표(43.03%)를 얻어 첫 선거에서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무렵 수원은 성장의 초입에 있던 도시였다.

1960년 수원 인구는 9만806명이었다. 5년 뒤인 1965년에는 12만3134명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 국가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됐다. 그 기로에서 수원의 인구와 도시 영역도 빠르게 확대됐다.

이병희의 정치적 성장도 같은 시기에 시작됐다. 이후 제7·8·9·10대 총선에서 연이어 수원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중앙무대를 누볐다. 1969년 국회운영위원장을 맡았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제1무임소장관을 지냈다.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중앙위원회 의장, 당 부의장 등을 거쳤다. 정치 밖에서도 활동 반경은 넓었다.

1964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농구협회장을 맡았고 아시아농구연맹 회장과 세계농구연맹 부회장 등을 지냈다.

중앙정치와 정부, 체육계와 해외로 활동무대가 넓어졌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은 줄곧 수원이었다.

그 관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오히려 오랜 정치적 공백을 겪은 뒤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이병희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제11·12대 국회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됐고 1987년 김종필 등이 만든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했다. 이듬해 제13대 총선에서 다시 수원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다.

처음 금배지를 달았던 때로부터 25년이 흐른 뒤였다.

대한민국의 정치환경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병희가 처음 국회의원이 됐던 제3공화국 초기와 달리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고 정당 지형도 변했다. 수원 역시 1960년대 초의 도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고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선거는 1996년이었다.

70세가 된 이병희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수원 장안에 출마했다. 민주공화당에서 시작한 그의 정치 인생은 신민주공화당과 민주자유당을 거쳐 자유민주연합에 이르렀다. 정당은 바뀌었지만 마지막으로 선택한 지역도 수원이었다.

제15대 총선 결과 수원 장안에서는 이병희가 당선됐다.

6·7·8·9·10·13·15대. 38세의 첫 당선부터 70세의 마지막 당선까지 이병희는 지역구에서 모두 일곱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7선 의원’이라는 숫자만으로 이병희와 수원의 관계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지역정치는 지금보다 주민의 일상과 훨씬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이병희의 삶을 다룬 평전과 지역의 회고에서도 지역민의 취업과 각종 민원, 주민들의 대소사를 적극적으로 챙겼던 정치인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수원에서 그에게 ‘마당발 정치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20년 발간된 평전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 역시 그의 생애와 함께 수원의 변화 과정을 다뤘다. 지역 언론들은 평전 출간 당시 경기도청과 삼성전자 유치, 수원화성 복원 등 수원의 주요 변화 과정에 이병희가 관여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정치에서 수원은 선거를 치르기 위한 공간에만 그치지 않았다.

중앙에서 활동하면서도 수원 지역의 상공인과 원로, 체육인 등과 폭넓게 관계를 이어갔다는 회고가 남아 있다. 중앙에서 얻은 정치적 영향력과 인적 관계를 지역 현안에 연결하는 것이 그의 정치 방식이었다.

그렇게 수원은 한 정치인의 단순한 선거구를 넘어 정치적 고향이 됐다.

1996년 일곱 번째로 국회에 입성한 이병희는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1997년 1월 13일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도 그는 수원의 현역 국회의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정치 인생과 수원이 함께 변한 시간은 30년을 훌쩍 넘는다.

1963년 첫 금배지를 달았을 때 수원은 인구 10만명 안팎의 도시였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었고 1980년대에는 동수원 개발이 이어졌다. 이병희가 마지막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1990년대에는 이미 이전과 전혀 다른 대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수원시 역시 1960~1970년대를 오늘날 도시 발전의 주춧돌이 마련된 시기로 설명한다.

정권이 바뀌었고 정당은 생겨났다 사라졌다.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 사이 수원도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었다.

첫 금배지를 달아준 곳도 수원이었고, 오랜 정치적 공백을 끝내고 국회로 돌려보낸 곳도 수원이었다. 70세 정치인에게 마지막 금배지를 안긴 곳 역시 수원이었다.

수원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년 이병희가 인연을 맺고, 정치인 이병희를 품은 건 수원이었다.

수원이 이병희를 정치인으로 키운 그 시간 동안, 이병희도 수원의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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