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탄생 100년] ④ ‘Team 이병희’ … 결국 사람
편집자주 -
2026년은 백웅 이병희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수원에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경기도청 이전과 수원화성 복원, 기업 유치 등 수원이 성장하는 과정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그 뒤에는 중앙정부와 기업, 공직사회와 지역을 연결했던 그의 헌신이 있었다. 수원일보는 탄생 100년을 맞은 백웅 이병희 선생과 수원이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본다.
이병희에게는 평생 따라붙은 별명이 하나 있었다.
‘마당발 정치인’.
7선 국회의원에 장관, 집권여당의 주요 당직을 거친 정치적 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권은 물론 관료와 기업인, 체육계와 지역사회까지 활동 영역을 넘나들며 사람을 만났고 그 관계를 오래 이어갔다.
이병희의 정치적 자산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었다. 그 중심에는 김종필이 있었다.
두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였다. 5·16에 함께 참여했고 이후 정치에서도 오랫동안 길을 같이했다. 이병희는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고 1987년 김종필이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자 합류했다. 1990년 3당 합당에도 함께했고, 1995년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두 사람이 교분이 두터웠으며 정치적 행로를 함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0년 넘게 이어진 관계였다.
하지만 이병희에게 인맥은 정치권에만 머물지 않았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이병희와 이병철의 인연은 5·16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 서울시지부장을 맡았던 이병희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인들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이병철을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희가 기업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했고 이 과정에서 이병철과 관계가 형성됐다. 이후 삼성이 전자공장 부지를 물색하자 이병희가 이병철에게 수원을 권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삼성전자 수원 유치로 이어졌다.
인맥을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지역의 결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병희 정치의 특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수원의 현안과 연결했다는 데 있었다.
이병철과의 관계는 삼성전자로 이어졌고 김종필을 비롯한 중앙정부 인사들과의 관계는 수원의 굵직한 현안을 풀어가는 정치적 통로가 됐다.
그러나 굵직한 사업을 정치인 혼자 만들 수는 없었다.
이병희에게는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드는 실무자들이 있었다.
수원화성 복원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초 정부는 이순신 장군 유적과 진주성, 행주산성 등 호국문화유적 복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수원화성을 국가 복원사업에 포함시키려면 정부를 움직일 명분과 계획이 필요했다.
이병희는 당시 제1무임소장관실에서 일하던 임수복 사무관에게 수원화성을 연구하고 국가사업에 포함시킬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임수복은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현장을 조사하고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약 두 달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수원화성과 융·건릉, 용주사 등을 아우르는 ‘화산대효원종합계획’이었다.
정치인의 구상이 실무자의 계획으로 바뀐 것이다.
계획서는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계획서를 검토한 뒤 문화공보부에 종합계획 수립을 지시했고, 같은 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후 문화재관리국과 제1무임소장관실, 경기도와 수원시가 협업하면서 수원화성 복원사업이 본격화됐다.
이 과정은 이병희가 일을 추진했던 방식을 보여준다.
정치인이 방향을 잡고, 전문가와 공무원이 계획을 만들고, 중앙정부의 결정권자를 설득한 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실행하는 방식이다.
성과 앞에는 이병희가 있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기업 유치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 공장 부지를 찾을 때는 이병철과 직접 현장을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초 천천동 일대를 검토했다가 공장 부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다시 수원 외곽을 돌며 대체지를 찾았고, 결국 매탄동 일대가 새로운 후보지가 됐다.
한 사람이 모든 답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업가는 투자 여부를 판단했고 공무원들은 행정절차를 처리했다. 중앙정부는 정책과 예산을 결정했고 지역 인사들은 현장에서 움직였다.
이병희는 그 사이를 오갔다.
때로는 정치적 경쟁자와의 관계도 경계를 넘었다.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이병희는 수원에서 신민당 김두한과 맞붙었다. ‘장군의 아들’로 이름을 알린 김두한과 치열한 선거전을 벌여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선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관련 지역 기록에는 4년 뒤인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김두한이 이병희의 찬조연사로 수원 유세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선거에서는 적으로 만났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같은 편에 선 셈이다.
정치적 경쟁을 인간관계의 단절로까지 가져가지 않았던 당시 정치의 한 단면이자, 이병희가 얼마나 폭넓게 사람을 상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그의 활동 영역은 정치와 경제를 넘어 체육계로도 뻗어 있었다.
1964년 대한농구협회장을 맡은 뒤 1980년까지 연임했고, 아시아농구연맹 회장과 세계농구연맹 부회장도 지냈다.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한국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치인의 이력으로는 이례적일 만큼 오랜 기간 국내외 체육계에서 활동했다.
중앙정치에서는 김종필과 함께했고, 기업인 이병철과 관계를 맺었다. 수원화성을 되살릴 때는 임수복 같은 실무자가 움직였다. 기업인과 관료, 학자와 지역 인사, 체육인까지 이병희 주변에는 서로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단순히 발이 넓다는 의미로만 보면 이병희 정치의 한쪽만 보게 된다.
그에게 관계는 일을 만드는 수단이었다.
수원에 필요한 것이 생기면 중앙정부로 올라갔고, 기업이 필요하면 기업인을 만났다. 아이디어가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았고 이를 계획으로 만들 실무자를 붙였다.
그 방식에는 분명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권력 핵심부와의 개인적 관계가 지역의 자원을 끌어오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오늘날처럼 제도와 절차를 중심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와 그대로 비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2026년의 지역정치가 되돌아볼 지점은 남는다.
지역의 큰 문제는 정치인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기업과 전문가, 시민사회를 움직이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하나의 목표로 묶어야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반세기 전 이병희가 했던 일도 결국 그 과정이었다.
혼자 모든 것을 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 힘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지역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것이 힘이었다.
이병희에게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수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