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보건의 발달. 우리는 그 혜택으로 나이 80을 누구나 기대한다. 제미나이에게 현재 한국의 80세 인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모두 26만 1,648명인데, 남성은 11만 1,661명, 여성은 14만 9,987명이라고 한다.(한국 전체 인구는 5,108만여 명) 의외였고 팔순의 무게를 더 느꼈다. 우리는 인생 80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한다. 10대를 비롯해 각 연령대가 80세에 갖는 수량 감각이나 이미지가 각각 다를 것이고, 90대의 그것도 물론 그럴 것인데, 무엇보다 이 나이에 이른 사람들의 관련 소회는 전 연령대가 공유 대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질 것 같다.
다음 시에서 팔순에 이른 시인은 회고의 성찰을 ‘그리운 모든 것 아직 그대로인데/이게 웬일이냐고 새삼 돌아본다’라고 시작한다. 아니 칠십을 넘자말자 망팔(望八)이라고 하는 관행도 있고, 본인도 그 이전부터 의식했을 테고, 또 지긋한 나이와 무관한 소감 같아서 우리는 의아해하기 쉽다. 시인도 이런 반응을 몰랐다하기 어려운데도, 시인은 유감을 있는 그대로 직절하게 토로하고 만다.
어느덧 팔순(八旬)에 이르렀다니
그리운 모든 것 아직 그대로인데
이게 웬일이냐고 새삼 돌아본다
그리운 구석구석 모두 그냥 숨어 있는데
뜻하지 않은 황무(荒蕪)의 땅에
이르렀는가
뭘 찾아다닌다고 하였으나
무엇인지 아득한 나이
나에게 왔다가 간 모든 것
인생의 페이지를 더듬는다
더듬는다, 더듬어지지도 않는다
아름다움과 그리움은 머언 무지개
그런데도 어딘가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어쩌면 황야의 한 티끌로 향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
머언 무지개는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팔순(八旬)에 이르렀다」/윤후명(1946-2025)
다시 말해 ‘그리운 모든 것 아직 그대로’란 소회의 단서에는 80세가 되어도 젊은 시절 이래 ‘그리운’ 그‘것’들과 그 지향이 쇠락하지 않았다는 자각과, 막상 80이 되자 오히려 관련 원망(願望)이 새로워진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어느덧 팔순(八旬)에 이르렀다니’란 진술도 그러하다. ‘어느덧 팔순(八旬)에 이르렀네’나 ‘어느덧 팔순(八旬)에 이르렀구나’보다 팔순과의 거리가 길고 그 탄식의 자의식도 덜 짙다.
하지만 과도한 욕망이자 과분한 미련, 즉 노탐(老貪)이라하기는 저어된다. 시인 마음의 이 상태를 그렇게 쉽게 수렴한다면 선입견의 관행이거나 그 성급한 부작용에서일 수 있고, 몸은 늙었으나 마음은 청춘이라는 언급을 우리는 이제 탄식으로 듣지 않고 생리의 하나로 공명하고 있기도 하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고 스스로 진단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고, 그래서 일시 착종으로 그만 절제하지 못하다가 특히 젊은 이성들로부터 분외의 주책이라 조소 받거나 그들을 자못 불쾌하게 하지 않나.
또 이어지는 ‘그리운 구석구석 모두 그냥 숨어 있는데/뜻하지 않은 황무(荒蕪)의 땅에 이르렀는가’란 회오도 과도한 겸사라거나 감상(感傷) 표출이라 간주하기에도 망설여진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염원, 그 시도와 모색이 원만해지기를 소망하지만, 80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주관 객관 양면에서 그 성취를 인정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아무래도 우리는 시인의 토로를 우리 인생의 지난한 숙제도 상기하며 수긍할 것 같다.
나아가 우리는 ‘나에게 왔다가 간 모든 것/인생의 페이지를 더듬는다/더듬는다, 더듬어지지도 않는다’는 토로에도 같은 나이 같은 경지가 아니지만 공감을 표명할 수 있다. 대체로 지난 삶 회억은 잘 ‘더듬어지지’ 않는다. 자랑스러운 국면도 수치스러운 국면도 있지만 기억은 왜곡되기 쉬우며, 같은 장면도 시차에 따라 시각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그리움은 머언 무지개’란 진술은 앞의 ‘그리운 구석구석 모두 그냥 숨어 있는데’와 병렬되면서, 이 향수 같은 심정이 과장이 아니라고 여겨지게 한다.
시인은 드디어 이상 소회를 종합해 다음과 같은 자각으로 자신을 격려한다. 나이 80에도 여전히 자신이 추구해온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지향할 것이며, 자신의 여로가 결국 ‘황야의 한 티끌’이 종착지가 될지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길을 모색하여 현재로선 알 수 없는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고.
우리는 여러 시에서 인생은 시공의 나그네라는 저음 고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 시 역시 그런 인식을 기초로 80 전후의 행로를 일관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를 쓴 해에 별세하여 그 진척이 중단되었는데 그래도 내심 행복했을 것이다. 다른 일반 나그네와 달리, ‘아름다움과 그리움’이란 ‘머언 무지개’가 무엇인지 알았고, ‘머언 무지개는 어디 있는가’라고 자문했지만, ‘아득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나마 본 듯하다. 그리고 일생에 걸친 긴 긴 모색에도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이상 방황이 아니었으며, 아마 도달 여부도 애초부터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