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의 매화를 완상(玩賞)하자는 소식이 근년에 해마다 있었으나 참여하지 못했다. 올해는 그 앞에 서서 어느 분을 모방하여 무슨 대화든 한번 해보아야지 하였는데, 회합이 취소됐다. 그러자 사정을 두루 감안한 한 존경하는 선배가 주희와 이황의 매화시를 검토한 논문을 카톡에 올려줘 유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였다. 매화. 매화는 동장군(冬將軍)의 냉혹한 위세에도 구애받지 않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개화(開花)로 자신을 다소곳이 현시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예고 아니 도래케 하고 또 봄을 봄답게 하여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여러 동기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곧 열릴 섬진강 하구 광양매화축제 등등 전국에 걸쳐 유명 행사도 많다. 매화에 여러 기릴 의미가 있지만, ‘매혹의 영롱한 향기 어린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청결한 희망’을 추천한다.    

 알려진 대로 퇴계 이황(1501-1570)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혹애(酷愛)’하며, ’매형(梅兄)’이라고도 했다. 평생에 걸쳐 매화를 주제로 한 시를 100편 넘게 쓰고 그 시편을 엮은 『매화시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세하면서 ‘매화에게 물을 줘라’ 유언하기도... 퇴계 같은 도학자가 자신의 호오를 이렇게 부각하다니, 의아할 정도로 과감하였다. 매화 애착에는 매화의 지향에 역행(逆行)하는 어떤 것들을 증오한다는 뜻도 병렬되어 있지 않는가. 이러한 경사(傾斜)는 심미 취향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40대 중반에 ‘돌아가는 시냇물’이란 뜻의 ‘퇴계(退溪)’를 호로 작정한 취지에 도시의 관료에서 전원(田園)의 은자로 돌아가겠다는 뜻만 있었을 리 없다. 다음 시는 퇴계가 1569년 음력 3월 3일에, 그동안 지루한 출사와 퇴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완전한 은퇴를 왕명으로 허락 받고 서울을 떠나며 지은 시이다.

頓荷梅仙伴我凉(돈하매선반아량) 매선이 쓸쓸한 나의 짝이 되어

客窓蕭灑夢魂香(객창소쇄몽혼향) 객창 깨끗하고 꿈길도 향기로웠네.

東歸恨未携君去(동귀한미휴군거) 동쪽으로 돌아가며 데리고 가지 못해 서운하니

京洛塵中好艶藏(경락진중호염장) 서울 티끌 속에서도 예쁜 모습 잘 간직하게나.

 

聞說陶仙我輩凉(문설도선아배량) 도산의 내 벗들이 쓸쓸하게 지낸다고 들었는데

待公歸去發天香(대공귀거발천향) 공이 돌아가면 가장 멋진 향기 피우리라

願公相對相思處(원공상대상사처) 마주하는 곳에서나 그리워하는 곳에서나

玉雪淸眞共善藏(옥설청진공선장) 옥설 같은 맑고 참됨 고이 간직하였으면

                           - 「한성우사분매증답(漢城寓舍盆梅贈答)」/이광호 번역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퇴계와 매화가 서로 화자(話者)로 나서서 주고받은 증답시이다. 첫 수는 퇴계가 매화에게, 둘째 수는 매화가 퇴계에게. 둘째 수의 화자 매화는 퇴계가 창조한 허구 인물이며, 또 퇴계의 감정과 인격이 이입된 퍼소나(persona)이다.[현대시에서 이런 의도의 대화체 발화방식을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매화를 매선으로 받드는 첫 수에서 우리는 특히, 마지막 서울 관료 생활을 매화처럼 마무리하려던 퇴계의 심정과 의지를 알 수 있다. 둘째 수에서는 결국, 퇴계가 매화를 바라보는 시각, 즉, 매화를 상대하며 자신을 격려하는 지취가 바로 ‘청진(淸眞)’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젊은 세대는 이 메시지를 시대의 현실에서 괴리된 조선 유한계층의 정서 표출이라 생각하기 쉽다. 퇴계의 삶을 웬만큼 아는 사람들도 이런 시를 한 도학자의 고아한 취향으로 얼핏 제한하기 쉽다.[천석고황(泉石膏肓)] 하지만 청진 지향은 당대의 암울하고 무도한 패륜과 폭력을 왜곡하지 않고 직시한 퇴계의 현실의식이 그 기초이다. 즉, 퇴계의 매화 시들은,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사화(1545)가 연속하던, 유자광 임사홍 남곤 윤원형과 이기 김안로 등등 희대의 권귀 척족들과 그 휘하 무리들이 전제 왕권을 가진 왕의 사욕에 아부하며 국기(國紀)를 농락하고 훼손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퇴계는 자신이 닦는 학문의 최종 귀결을 ‘所願善人多(소원선인다 : 내 소원은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라고 점철하였는데, 그 ‘착한 사람’은 ’청진의 언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퇴계의 매화 사랑은 개인의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시대의 저변 비리를 통찰하며 그 해결을 염원하는 경세제민의 한 발로였다. 아시다시피 퇴계는 당시에 18살 선조에게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제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6년 뒤 1575년에는 권귀 척족들과 싸우다 패퇴했다가 겨우 일어선 선비 관료들이 이번에는 당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고, 그 20년 뒤 1589년에는 결국 두고두고 그 여운과 원한이 지속돼 나라와 민생을 망치는 불치의 고질이 된 ‘기축옥사’가 야기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들의 탐매(探梅) 행사와 매화를 다룬 현대시들에도 그 기리는 이면에 혹 어떤 함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20세기 직전부터 일제의 유린을 거치며 오매불망 기구하였던 민주주의와 공화, 그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기초인 ‘인정(人情)’과 문화. 과연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시절 일제와 분단과, 독재와 이데올로기와 싸우며 치른 막심한 희생과 헌신에 어울리게 그것들이 현재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 성찰도 어떻게 내포하고 있는지 새삼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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