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 (180)] ‘비는 비의 사정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Preparing the Tiếng Việt translation… (한국어 원문 표시 중)

김승종 / 전 연성대 교수 ·시인

[김승종의 문학잡설(162)] ‘사막의 꽃’
[김승종의 문학잡설(162)] ‘사막의 꽃’

거대한 풍선으로 부풀어 내려앉은 무더위의 압박이 좀 줄어들었지만 마르고 말라 비틀어져 갈라진 저수지 바닥의 검은 틈은 더 커지고 있다. 경작에 종사하든 않든 우리는 어느 여름보다도 어서 비가 내리기를, 아니 오시기를 바라며 가끔 하늘을 쳐다본다. 이런 시기에 비를 다룬 다음 시를 만나 읽었다.

눈 위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을 아무리 꽃이라고 우겨도 향기가 날 리 만무한 것처럼 비가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미안하게도 비는 성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면 조금 전에 들은 빗소리를 소환하십시오

가장 유쾌하게 비명 지르는 건 함석지붕, 가장 순발력 있게 빗방울을 되받아치는 건 돌덩이지요

유리 주먹을 가진 비의 스파링 상대로는 일찌감치 유연성을 배운 연두나 초록 글러브를 낀 나뭇잎들이 제격입니다

짙은 멍 때문에 오해 부르기 십상인 꽃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얼굴부터 들이밀어 어쩔 수가 없답니다

낙엽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거미줄의 사정이지 바람의 사정이 아닌 것처럼 비는 비의 사정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 버티던 설움, 그 짜디짠 거라도 먹여야 할 것들이 있기에 퉁퉁 부은 울음보를 끌어안고 죽거나 살거나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 「비를 위한 변명」/한혜영

우리는 6연까지, 담담하게 전개되는 비의 무성(無聲)을 대신 변명하는 화자의 의인화 진술에 매력을 느끼며, 이 변명이 수사로서만이 아니라 사실로서도 성립된다고 추인한다. 그렇다. ‘비는 성대가 없기’에[비는 그 자체 발성이 없기에], 이른 바 ‘빗소리’는 어색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가 오면 그 소리 청취를 전제하고 어떠하다고 표현하며 인정해왔던 것이다. 이 시의 1, 2, 3연에서 우리는 빗소리가 비가 내는 비의 소리가 아니라, 비와 사물이 접촉하여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소리[새소리 벌레소리와는 다른]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긍정한다.

문제는 관성을 일탈하게 하는 그런 조우만이 아니다. 우리는 마지막 7연을 읽고 그 충격에 어리둥절해진다. 비가 ‘참고 버티던 설움’ 그 자체라니. 아니 혹은 그 ‘설움’을 몸으로 육화한 주체라니. 6연을 읽고 나서 우리는 비의 정체성 제시를 기대하지 않았거나 못했으며, 혹 기대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체성을 예상하지 않았거나 못한 듯해서 그럴 것이다. 다시 말해 7연은 우리에게 갑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제시된 정체성이 신선하다. 게다가 우리는 추가되는 ‘그 짜디짠’이란 부연에도 감탄하고, ‘그 짜디짠 거라도 먹여야 할 것들이 있’다에도 연속 그러하며, ‘퉁퉁 부은 울음보를 끌어안고 죽거나 살거나 뛰어내리는 것’이라는 토로에 우리는 긴장을 이완할 여유가 모자라기만 하다. 이 신속하고 짐작하지 못한 진전, 하지만 우리는 이 맥락의 메시지를 음미에 가깝게 잘 감상하기는 한다.

어떤 대책도 없이 한해(旱害)로 강제로 수척해져 죽기 직전이라면 지상의 사물은 마땅히 ‘그 짜디짠 거라도 먹여야 할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낙엽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거미줄의 사정이지 바람의 사정이 아닌 것처럼’ 그것들의 ‘사정’이지, 비의 ‘사정’이 아닌데도, 화자는 ‘비의 사정’이라면서, 비는 ‘뛰어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죽거나 살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이 시에서 형상화된 비의 인애와 자비가 어우러진 크나큰 헌신의 덕행과 또 한참 마주한다. 동시에 이 시가 자연의 하나인 비를 예찬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현상에 의탁한 알레고리로 쓰였다고 추정하고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이 비가 무엇의 환유인지 궁금하다. 이 지점부터 우리는 조심하면서도 아무튼 연상할 수밖에 없고, 아마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신산한 구로(劬勞), 그 생육지은(生育之恩)을 떠올릴 것 같다. ‘먹여야 할 것들[자식들]이 있기에 ‘퉁퉁 부운 울음보를 끌어안고 죽거나 살거나 뛰어내리는’ 면모에 잘 어울리는. 하지만 이런 도식의 재현에 그치지 말고 다른 그 무엇을 더 계발한다면 이 감상에서 더 좋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투신의 헌신으로 내리는 비에서 인애와 자비를 그저 흥건하게 감지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처럼 그 대덕을 자신도 한번 시도해볼 의향을 감히 가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 비에 젖어서, 젖다가.

참고로 이 시의 여운을 음미하다보면 애초에 좀 길다고 여기기도 했던 1-5연의 변명과 관련 부연이 왜 그랬는지 인정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7연의 진술이 잘 극화처럼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5연은 이전의 소리와 다른, 즉 비와 접촉해서 생길 수 있는 ‘꽃’의 ‘짙은 멍’에 관련된 변명인데, 우리가 또한 재미있게 경청한 국면이다. ‘꽃’ 회피는 비의 ‘불문율’이지만 그럴 수 있는 ‘사정’은 ‘꽃’이 비를 맞으려고 ‘얼굴부터 들이밀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꽃은 ‘함석지붕’이나 ‘돌덩이’와 달리 비에 진지한 친연의 관계라는 시사인데, 비의 이미지에 그 연대의 매력이 함축되어 있다.

또 전편을 통독하고 고려되지만 변명 관련 화자의 동기도 주목된다. 우선 보기에 한재(旱災) 와중에 사물들이 기구해도 내리지 않는 비에 연관된 변명이 아닌 것 같지만, 결국 소진(燒盡)보다 더 가혹하게 생명들이 소진(消盡)되고 있는 그 재난을 마침내 온몸으로 수폭(水爆)하는 비의 위대한 자정(慈情)을 부조(浮彫)하는 의도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비가 드디어 쏟아지고 쏟아지자 사물들의 소생 양상과 그 심정도 추정해 간접 대변하기도 하는.

독자들의 태도도 다시 말해 달라질 것이다. 비 오시는 정경에 그저 감사하는 심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계선을 확연하게 넘어서는 감격의 상태로. 비가 끝내 터트리지 못하는 ‘울음보’를 대신 터트리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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