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화(文話) 시대 세계가 찬탄한 훈민정음의 과학성과 ‘디지털 정글’에서 신음하는 우리 말글
[지금은 문화(文話) 시대]-11
![[서울=뉴시스] 김금보 기자 =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뒤로 한글날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2026.10.08. kgb@newsis.com](https://www.suwonilbo.kr/img/write/p42066e211e11e91da60d9aadd2bce05d183bc37e.jpg)
세종의 애민정신이 빚어낸 인류 최고의 문자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조선어연구회 선구자들이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첫 '가갸날'을 선포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세종대왕이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애민정신으로 빚어낸 한글은, 오늘날 인류가 발명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디지털 정보화와 K-컬처를 이끄는 눈부신 성취
언어학자들이 입 모아 찬탄하듯, 한글은 세상의 거의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탁월한 표음문자다.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창제 원리는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치밀한 과학성을 담고 있다.
특히 정보화·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한글의 진가는 더욱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초·중·종성을 모아쓰는 네모 반듯한 조합형 구조는 정보의 집약도가 매우 높고, 스마트폰 자판 환경에서 가장 빠르고 직관적인 입력 속도를 자랑한다. 전 세계 수많은 문자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기계적 제약에 부딪힌 반면, 한글은 태생적 유연성 덕분에 모바일 환경을 선도할 최적의 문자임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
여기에 한글은 오늘날 전 세계를 매료시킨 K-컬처 열풍의 가장 강력한 심장부이기도 하다. K-팝 가사에 담긴 섬세한 감정선, 영화와 드라마 속 깊이 있는 대사는 한글 고유의 운율과 결합해 지구촌 젊은이들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고 한국어로 소통하는 현상은 단순한 언어 습득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는 세계적 연대의 장으로 확장되는 중이다.
‘디지털 정글’ 속에서 뿌리째 흔들리는 말글의 품격
그러나 이처럼 세계적인 문자 반열에 오른 한글의 외형적 성취 뒤로, 정작 안방인 국내 언론 현장과 일상에서는 참담한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뉴미디어와 SNS의 바다 속에서 편리성만을 좇는 무분별한 줄임말, 뜻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은어와 비속어, 그리고 정체불명의 외국어 남용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더 큰 문제는 기본적인 '문해력의 실종'이다. 글자는 누구나 손쉽게 입력하고 소비하지만, 정작 낱말의 속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세대 간 소통에 깊은 균열이 가고 있다. '심심한 사과(매우 깊고 간절한 사과)'라는 표현에 '지루하다'는 엉뚱한 오해를 품고 분노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우리 사회의 언어적 깊이가 급격히 얕아지고 있음을 알리는 뼈아픈 경고등이다. 언어는 그 민족의 사고 체계이자 정신의 영토다. 말글이 가벼워지면 생각의 깊이도 얕아지고, 민족의 정체성마저 뿌리째 흔들리기 마련이다.
100년 전 선조들의 통곡을 거울삼아 세워야 할 과제
한글날 제정 100주년과 반포 580돌이라는 영광스러운 숫자는 우리에게 자화자찬을 허락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00년 전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던 최악의 탄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가갸날을 지켜내려 했던 선조들의 절박한 통곡에 귀를 기울이라는 시대적 명령이다.
디지털 문명의 속도전 속에서 한글의 정보화 우수성을 꽃피우는 것만큼이나, 말글의 품격과 고유의 아름다움을 복원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언론과 사회의 공동 과제다. 세종의 애민정신과 선조들의 피땀 어린 투혼을 이어받아, 우리 말글의 상처를 보듬고 바른 언어생활을 가꾸는 일, 그것이 바로 다가올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가장 값진 100년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