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는 망한다는 남공의 말이 꼭 맞지는 않는구나. 한 번 무관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 끊겼는데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 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임진왜란(1592•선조25년)초기 북관(北關•함경도)대첩의 영웅 정문부 장군(鄭文孚•1565-1624)이 지은 시다.

이 시는 농포(農圃•정문부의 호)가 창원부사를 하고 있을 때인 1618년(광해군10년) 역사적 사실들을 소재로 읊었던 영사(詠史) 10 수(首) 중의 1 수다. 그의 문집인 농포집에도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패자( 覇者)인 진(秦)나라와 자웅을 겨뤘던 초(楚)나라 회왕이 땅을 떼어주겠다는 진나라 소양왕(昭襄왕)의 계략과 장의(張儀)의 감언이설에 속아 진나라에 갔다가 무관에 억류돼 일생을 마친다.  장의는 당시 소진(蘇秦)과 함께 세 치 혀로 천하를 농락하던 당대 제일의 유세객이다.

그 뒤 전국 말기 회왕의 후손인 웅심(熊心)이, 비명에 간 회왕을 기리고 진나라에 대한 초나라 백성들의 복수심을 일깨우며 천하통일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항량(項梁)에 의해 다시 회왕으로 추대됐다.

웅심은 훗날 초나라 황제가 돼 의제(義帝)로 불렸으나 유방(劉邦)과 천하를 다투던 항우(項羽)에게 거슬려 끝내 살해되고 만다.

농포는 초나라의 회왕과 의제에 얽힌 이처럼 비극적이고도 슬픈 운명과 아픈 역사를 칠언절구의 짧은 시속에 함축해 읊조린 것이다.

바로 이 시가 빌미가 돼 임진왜란이 끝난 지 26년, 그리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624년( 인조2년) 10월 정문부는 역적으로 몰려 심한 매질 끝에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허무하고 원통할 데가 어디 있을까?

약 4백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이에 관한 사료들을 들춰볼 때마다 치가 떨리고 화가 치솟는다.

도대체 이 시의 어느 부분이 역모나 역심(逆心)에 해당하길래,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국난극복의 용장(勇將)을 잡아다가 때려 죽였을까?

초나라 두 회왕에 빗대어 후금(後金•淸나라 전신)과의 실리외교로 조선의 입지를 넓히려다 왕좌에서 축출된 광해군을 안타까워하고, 못난 인조가 반정(反正) 으로 왕위에 오름을 꼬집은 것이라고 한껏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렇게라도 억지로 꿰맞춰봐도 역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광해군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성군(聖君)도 아니다. 오히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어미인 인목대비마저 서궁에 유폐시켜 조정은 물론 백성의 원성(怨聲)이 자자했었다. 후금과의 실리외교는 대다수 백성들에겐 관심밖이다.

정문부가 광해군 때에도 내직은 사양한 채 짧지만 몇 차례 외직을 나갔었으니, 패륜(悖倫)한 임금일지라도 한 때 자신이 섬겼던 임금에게 한가닥 연민의 정이 있음은 신하로서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왕조시대라지만, 이것마저 꼬투리를 잡아 죄를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인조에 대한 불충(不忠) 또는 역심은 더더욱 말이 안된다. 인조가 반정한 해는 1623년이고, 정문부가 이 시를 지은 때는 앞서 말했듯이 1618년이니, 인조의 등장을 미리 5년 전에 내다보고 역심을 드러냈단 말인가.

정문부는 그에게 반감을 가졌던 몇몇 사악한 반정공신들의 분풀이에 끝내 제물이 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임금을 갈아치우는 혁명에는 권력만을 탐하는 숱한 불나방들이 꼬여든다. 인조반정 때 특히 심했다. 반정에 참여했던 많은 공신이나 임금이나 무능하긴 매일반이었다. 일부 공신의 경우, 대의는 안중에도 없고 겁많고 교활하며 탐욕스런 권간(權奸)들이었다.

이런 간신배들 때문에 결국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도 조선 5백년사에 가장 못난 임금중의 한 명으로 전락한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줄행랑치고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 사람 죽이는데는 주저없이 앞장섰던 김자점(金自點)같은 자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권력을 제멋대로 농단하는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처럼 야비한 권력에 붙어 총대 메고 으시대며 이권챙기기에 눈이 벌건 '완장들'은 그 하수인들이다.

총칼을 들지 않은 시민혁명이라고 다를 게 없다. 썩고 부도덕하면 이와 마찬가지다.

이른바 촛불혁명 덕에 집권했다는 문재인 정권이 그 단적인 실례다. 촛불 두 번만 들었다가는 나라 망하겠다는 많은 국민들의 원성(怨聲)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그 끝은 결국 정권의 몰락과 함께 국민과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러고도 일말의 반성조차 없이 국회 입법권을 틀어쥔 채 사사건건 정부정책에 빗장을 걸며 온갖 미운 짓은 골라가며 다하고 있으니,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나?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내후년 총선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정문부는 당초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됐다 하여 의금부에 잡혀 들어갔으나 대질신문에서 결백이 밝혀져 곧 석방될 참이었다. 

반적들과 내응했던 부사과(副司果•五衛의 종5품무관직) 박래장(朴來章)이란 자가 혼자 맘속으로 문무를 겸전한 정문부를 반란군 대장으로 점찍었다. 그리고는 평소 안면있는 의생(醫生) 이대검(李大儉)이 정장군의 종기를 치료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뜻을 떠보라고 일렀고, 이 말이 체포된 반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정문부와 대면한 이대검이 "朴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지만, 종기치료한다고 침 한 번 놓았을 뿐인데 어떻게 장군께 그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진술, 역모연루 건은 혐의없음으로 일단락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움직여 다시 '초회왕'시를 들이대며 "불순한 저의가 있다"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곤장을 쳐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잡혀오기 전부터 오래된 종기가 악화돼 이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를, 임진왜란 당시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고 피란다니기에 급급했던, 교활한 애송이들이 반정공신이랍시고 조롱하며 형신(刑訊)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대문장으로 당시 문사랑(問事郞•신문관)이었던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조익(趙翼)을 빼놓고는 그 누구도 구명에 나서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원통하다. 원통하다."를 되뇌었을까.

삭풍설한(朔風雪寒)속에 용맹을 떨치며 4개월여에 걸쳐  왜구를 토벌해 함경도를 탈환한 '백두산 호랑이'가 간사한 쥐새끼들에게 물려 죽었으니 말이다.

아, 슬프다. 장군이시여, 편안히 영면하소서.

그리고 이 백성, 이 나라를 굽어살피소서.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