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수많은 비극을 잉태한다.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보면 탐욕의 산물인 전쟁은 무조건 악(惡)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파멸과 파괴는 물론이고 엄청난 인명의 살상과 인륜의 황폐화, 야만과 공포, 아픔과 슬픔, 이산{離散)과 이별 등 사람으로서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최악의 고통과 불행을 초래한다. 

 지구상에서  지옥과도 같은 전쟁이 단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지만,  우리 만큼 그 신물나는 전쟁을 많이 겪은 나라도 드물다. 한국전쟁, 병자호란, 정묘호란, 임진왜란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한반도 곳곳에는 전쟁의 쓰라린 상흔(傷痕)들이 서려 있다. 이 중에서도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빚어진 1천만 남북 이산가족의 슬픔과 회한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시대도 그랬다. 앞서 언급한 세 차례의 큰 전쟁을 포함해 이민족과의 크고 작은 싸움으로 인해 야기된 통절(痛切)한 이산의 행렬은 일본 열도와 중국대륙에서 피눈물을 뿌렸다.  

광해군(光海君) 때 있었던 일이다. 조선은 명(明)나라가 후금(後金.淸나라 전신)을 치기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1618년(광해군10년)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1만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 때 조방장겸 좌영장을 맡았던 김응하 장군(金應河.1580-1619) 휘하에서 선봉에 섰던  병사들 중에 김영철(金英哲.19)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불렸던 김 장군은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심하(深河)에서 수만의 후금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했고, 김영철은 포로로 잡힌다. 

적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김영철은 그때부터 만주에서 전쟁포로가 아닌 노예의 삶을 산다. 고향이 그리워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모진 매를 맞고 발뒤꿈치가 베여나가는 혹독한 형벌을 두 번이나 당하고도 탈출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족(漢族) 노예 친구와 함께 마침내 탈출에 성공, 친구의 고향인 대륙 연안의 등주(登州.현 산동성 연대(煙臺))로 가 한동안 그곳에서 정착해 사는 등 10여 년을 중국땅에서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땅을 벗어나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전장(戰場)에서 일생을 마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세 번 결혼한다. 만주족 부인과의 사이에 2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등주에 있는 한족 아내에게서도 2명의 아들을 얻었다. 또 조선으로 돌아온 뒤 조선 여인과 결혼,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조선시대 적잖은 전란을 겪으면서 경우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김영철처럼 이국땅에서 모진 목숨을 살았던 '조선인 디아스포라(난민)'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들만 적어도 60만 명 이상이고, 여기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붙잡혀 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조선인들까지 합친다면, 모르긴 해도 1백여 만명을 훨씬 웃돌 것이다.     

이처럼 기구하고 굴곡진 삶을 살다간 김영철의 인생 유전(流轉)이 조선 후기 중인 출신의 문장가 홍세태(洪世泰.1653-1725)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에 <金英哲傳>이라는 전기(傳記) 형태로 자세히 실려 있다. 

그 이야기를  옮겨 본다(문맥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약간의 윤문(潤文)을 가했음).     

[김영철은 평안도 영유현(永柔縣) 중종리(中宗里) 사람이다. 그 집안은 대대로 무과에 급제했다. 영철은 어려서부터 말달리고 활쏘기를 좋아해 영유현의 무학(武學)이 됐다. 무오년(1618.광해군10년)에 명나라가 크게 군대를 동원해 건주(建州)의 오랑캐(後金)를 토벌할 적에 우리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조선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2만 명을 거느리고 갔다. 

영철은  그의 종조부 영화(永和)와 함께 좌영장 김응하 장군 부대에 배속돼 선봉이 됐다. 이 때 영철은 나이 19세로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총각이었다. 그의 부친 여관(汝灌)과 영철은 모두 독자로 형제가 없었다. 집을 떠날 때가 되자 영철의 조부 영가(永可)는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대(후손)가 끊긴다."고 울먹였다. 영철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하며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이 해 8월(이하 음력) 우리 조선군은 창성(昌城)에 모였고, 명나라군은 요동(遼東)에 모였다. 명나라 경략 양호(楊鎬)는 오랑캐 땅은 일찍 추워져 남방 사람들과 말은 겨울을 견디기 어려우므로 봄을 기다려 거병할 것을 명나라 조정에 주청했다. 기미년(1619.광해군11년) 봄 2월 강홍립은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경마전(景馬田)에서 명나라군과 합류, 우모령(牛毛嶺)을 넘어 진격해 적의 요새 10여 개를 격파하고 기세를 올리며 전진했다. 명나라군이 앞장을 서고 조선군 좌영부대가 그 뒤를 받쳤으며, 중영이 뒤를 이었고, 우영이 후미를 맡았다.

오랑캐군은 모두 정예부대로 수만 명에 달했다. 누르하치는 그의 아들 귀영가(貴永可)를 보내 명나라군을 격퇴하고 마침내 조선군 좌영부대에 접근, 전투를 벌였다. 김응하 장군은 급히 강홍립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강(姜)은 응하지 않았다. 부원수 김경서 장군만이 홀로 나가 싸우다가 돌아가 강홍립에게 오랑캐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오랑캐들이 몹시 피곤해 말안장을 끌어안고 자다가 말에서 떨어지곤 합니다. 우리가 큰 병력으로 협공하면 반드시 오랑캐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강홍립은 아무 말없이 주머니에서 (임금의)밀지를 꺼내 경서에게 보여줬다. 경서는 기세가 꺾여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응하는 전사했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했다. 

강홍립이 출병할 적에 선발된 항왜(降倭.임진왜란때 항복한 왜군) 3백명이 뒤따랐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들을 오랑캐에게 바치자 오랑캐 추장이 크게 기뻐했다. 다음 날 점검을 기화로 항왜들은 오랑캐 추장을 척살하고 강홍립을 옹위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모의했으나 이날 밤 이 모의가 누설되는 통에 항왜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조선군은 이를 보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랑캐들은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해 조선군도 죽이고자 했으나 내부적으로 논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조선군의 한 장수가 전투중에 목을 벤 오랑캐군 수급을 식기에 담아 갖고 있다가 항복할 때 발각돼 오랑캐 추장이 크게 노했다. 오랑캐 추장은 조선군 장병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용모와 의복이 반반한 4백 여명을 골라낸 뒤  "이들은 조선의 양반에 속하는 장교들이다. 우리에게는 쓸모가 없으니 다 죽이라."고 명했다. 이 바람에 영철의 숙부인 영화는 죽임을 당했으며, 영철 또한 이 무리에 포함돼 속절없이 참수될 참이었다. 

이 때 오랑캐 장수 아라나(阿羅那)가 앞으로 나서며 추장에게 아뢰기를, "제 아우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이 자의 용모가 제 아우를 꼭 닮았습니다. 바라건대 이 자를 살려주셔서 부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청하자 오랑캐 추장이 이를 허락했다. 아울러 항복한 한족 5명도 함께 하사했다. 아라나가 영철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집안사람들은 영철을 보고 크게 놀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온 것으로 여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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