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颦笑)선생? 이름도 생소하거니와 좀 생뚱맞고 어렵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요즘 대세인 인공지능(AI)의 대표선수격인 챗GPT에게 물어봐도 아마 시원한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가상의 인물을 들먹이는 건 아니고 조선 중기 이 땅에서 조용히 살다 간 실존 인물이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 조선 강토에 격랑이 일었던 선조(1567-1608)~인조(1623-1649) 때 조정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등용하는데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조충남(趙忠男)선생이 바로 그다. 

빈소선생은 그를 일컫는 사후(死後) 별칭이다.

조선 실학의 태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이 훗날 그에 관한 전기인 [빈소선생전(颦笑先生傳)]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것이다.

빈소(颦笑)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웃는다는 뜻이다.

그 시대 사대부라면 누구나 가졌던 그 흔하디 흔한 자(字)도 없고 호(號)도 쓰지 않았던 그에게 왜 갑자기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 그것도 사후에서야.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빈소선생은 원래 눈 밝은 재상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선생의 막역한 지우(知友)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원익이 누구인가?

선조•광해군•인조 등 3대에 걸쳐 5차례나 영의정을 맡아 국난을 수습하며 백성과 신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선 최고의 명상(明相)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평생을 지척에서 벗했던 선비라면, 그 또한 높은 학덕과 고매한 인품은 물론이고 남다른 혜안을 가졌던 고사(高士)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그를 두고 "고상한 행실을 가졌음에도 세상에 은둔한 사람"이라고 아쉬워한 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빈소선생은 은둔한 기인(奇人)이었다. 벼슬이라곤 통례원(通禮院)의 인의(引儀. 종6품)를 잠시 지냈을 뿐, 평생을 포의(布衣.벼슬없는 선비)로 살았다. 그러면서 가끔씩 여러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벙어리 행세를 했다고 한다.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그가 왜 병을 핑계로 멀쩡한 입을 닫았을까? 그는 중종때 개혁정치로 젊은 사대부들의 우상이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선생의 가까운 후손이다. 선생이 기묘사화로 한창 일할 나이에 사사(賜死)되고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나면서 실의와 좌절 속에 세상에 대한 뜻을 접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학문은 깊어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에다 사람을 꿰뚫는 혜안과 직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이를 일찍부터 알아본 이가 이원익과 또다른 벗이자 이인(異人)인 강서(姜緖)였다. 

좌•우승지와 수원부사 등을 지낸 강서도 만년을 술에 취해 미치광이 짓을 하며 보냈지만, 일찍이 정여립 역모사건에 따른 기축옥사와 임진왜란을 예언해 주변을 놀라게 했었다.

그는 광해군 때 후금(後金) 정벌에 나선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 1만3천여 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정했다가 후금에 항복, 불우하게 생을 마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큰아버지다.

명석한 이원익은 지략이 출중한 국사(國師)급의 전략가이자 벗인 조충남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평소 마음에 뒀던 훌륭한 선비나 조정에 기용할 인재를 시험할 때는 근처에 반드시 빈소선생을 숨겨뒀다고 한다. 다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했을 뿐이었다.

오리대감이 눈짓하면 빈소선생은 늘 두 가지 몸짓으로 응답했다. 웃음을 지어보이면 써도 좋을 만한 인재라는 표시였고, 얼굴을 찡그리면 ’등용 불가’의 신호였다. 그리고 인물의 좋고 나쁨(善惡), 바르고 삿됨(正邪), 장단점(得失)에 대한 그의 이 같은 판단은 모두 적중했다.

성호선생은 앞서 언급한 [빈소선생전(颦笑先生傳)]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선생은 입은 다물었지만 마음이 밝아 인물에 대해 적임자에겐 웃음으로, 그렇지 못한 자에겐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평가했는데, 훗날 모두 맞았다. 상공(相公.이원익)이 취한 것은 대체로 이에 기인한다.(先生口黙而心明,其於評騭,賢者以笑,否則以顰,後皆驗.相公之所取蓋爲此也.)"

여기서 한 가지 그냥 흘려버려서는 안될 중요한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 때 귀얇은 선조의 어리석은 오판으로부터 이순신의 목숨을 구해낸 1등 공신은 당시 전쟁의 최고책임자였던 도체찰사 이원익이었다. 정탁과 이억기 등 여러 신하들의 도움도 물론 컸다. 하지만 오리대감이 선조에 맞서 "이 사람을 죄주면 대사(大事)가 끝장날 것"이라며 이순신을 당쟁의 제물로 삼는데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원익이 이처럼 이순신장군을 절대적으로 신임한데는 장군이 나라를 구할 재목임을 일찌감치 알아본 빈소선생의 확신에 찬 웃음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몹시 시끄럽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비롯된다. 국회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전체 국회 의석(299석)의 과반이 넘는 169석을 장악한 제1야당은 허물 많은 자당 대표를 지키기 위한 ’방탄(防彈)’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도 모자라 지난번 ’검수완박’에 이어 이젠 공권력마저 비웃는 노조의 폭력행위까지 정당화하기 위한 ’노란봉투법안’까지 흔들어대고 있다. 고물가 등 경제불황 속에 갈수록 팍팍해지는 국민의 삶과 상식있는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도 아예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국회의원 한사람 한사람이 헌법기관이라는 국법의 지엄함과 막중한 책무는 벌써 온 데 간 데 없어졌으며, 단지 흉물스런 뻔뻔함만 남았다.

이러고도 입법부가 무사할 수 있다고 믿는가?

국회가 이른바 ’유해인간 집합소’로 변모했다는 국민들의 분노를 직시하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대통령실 참모진과 여당 핵심인사라고 하는 자들은 또 왜 그리 무능하고 경솔한가?

당대표를 새로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터져 나온 ’윤심’ ’친윤’ ’비윤’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어설픈 몸짓에 실망한 국민들의 한숨소리에 땅이 꺼지고 있음을 모르는가?

그런 오합지졸의 몰골로 갈수록 격렬해지는 제1야당의 치밀하면서도 간교한 공세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부와 집권여당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나된 자세로 오로지 국민•국익•경제 중심의 국정 운영에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과감하고 효율적으로 전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래서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고 국민의 신뢰를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총선 승리는 그 다음의 문제다.

빈소선생이 오늘 이 땅 후손들의 이처럼 찢겨질대로 찢겨진 형상을 봤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수심 가득한 얼굴로 심각할 정도로 일그러진, 확 찡그린 모습을 보였을 것으로 필자는 100% 확신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 하루 빨리 빈소선생 같은 책사를 찾아내길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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