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잇달아 왜적을 격파, 함경도를 탈환한 북관(北關•함경도)대첩의 영웅 정문부 장군(鄭文孚•1565-1624)은 참으로 팔자가 기박한 장수다.

그는 사대부 출신의 20대 의병대장으로 임진왜란 동안 적어도 육전(陸戰)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 만큼 숱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6천의 의병을 이끌고 북관의 매서운 추위와 삭풍 속에서 최정예 왜군인 2만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부대를 연전연파, 함경도땅에서 왜구를 완전히 몰아낸 것이 이를 웅변한다.

청정(淸正)부대와의 치열한 격전이 임란(壬亂)이 터진 해인 1592년 9월 하순부터 4개월여 동안 끈질기게 계속됐던 것도 전례없는 일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함경도 의병은 다른 지역 관군이나 의병들과 달리 세 가지 어려움을 안고 싸웠다. 왜적과 북방오랑캐, 그리고 왜적과 내응(內應)•결탁한 반란세력으로부터 함경도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정문부 의병을 '삼위군(三衛軍)'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정문부는 여진족들을 다독여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고, 반적(叛賊)들을 모조리 소탕했으며, 왜적들까지 함경도 밖으로 깡그리 몰아냈다. 관북의 '삼중고(三重苦)'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이를 높이 평가한 부분이 영조때 대사헌이었던 정암(貞庵) 민우수(閔遇洙)가 쓴 농포집(農圃集•농포는 정문부의 호)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공은 한 젊은 서생으로 의병을 이끌고 반란한 백성들을 제거하고 계속 여러 차례에 걸쳐 왜적을 격파하면서,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을 미리 막아 함경도가 적에게 함락됨을 면하게 하였다. 일일이 중흥의 공적을 헤아려 볼 때, 거의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公以眇然一介書生,糾率義旅,旣剪叛民,繼而屢破倭賊,逆拒胡寇,使關北一路,得免淪陷,歷數中興功績,殆無其比.)"

이처럼 눈부신 활약을 펼쳤음에도, 공은 승진과 포상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리고 공의 전공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에 묻혀버렸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前者)는 유영립(柳永立)의 후임으로 함경감사로 부임해온 윤탁연(尹卓然)이 공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형조판서와 호조판서 등 3차례나 판서를 지낸 윤탁연에게 강직한 성격으로 고분고분하지 않고 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젊은 정문부가 곱게 보였을 리 없었을 것이다. 공이 왜적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엄청난 승리를 거뒀음에도 윤감사는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서 정문부의 이름은 쏙 빼버렸다. 대신 자신의 맘에 드는 경성(鏡城)부사 정현룡(鄭見龍) 등에게 공의 전과(戰果)를 나눠주었다. 정문부에게 돌아온 것은 윤감사의 시기와 질책과 모함뿐이었다.

이 때의 상황이 대문장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쓴 <임진의병의 일을 기록하다(記壬辰擧義事)>의 '길주사적(吉州史蹟)'편에 나온다.

"이 때 관찰사 윤탁연은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을 미워하여 이를 덮어버렸다. 도리어 '문부가 본래 한 장수의 막료인데 스스로 대장이 된 것은 부당하며 이는 자신의 절도를 어긴 것'이라고 책망했다. 문부가 굽히지 않자, 탁연은 대노(大怒)하여 사실과 반대로 의주행재소에 아뢰고 문부가 벤 왜적의 수급들을 자신의 휘하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문부가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하는 계책을 꾸몄다."

이를 두고 영조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북방이 평정된 것이 누구의 공이던가. 아, 너희 측근 신하가 도리어 충신을 헐뜯었도다(朔方載定,伊誰之功.咨汝屛臣,乃反訾忠)."

공의 전공이 오랜 세월 역사의 암흑에 갇혀 있었던 것은 인조 즉위 다음 해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장살(殺)당한 탓도 크다(이 부분은 앞서 쓴 '초회왕이 뭐길래'에서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함).

원혼(寃魂)이 돼 구천을 떠돌던 장군의 원통함이 뒤늦게나마 풀어진 것은 그의 사후(死後) 41년이 지난 1665년(현종6년)이다.

당시 함경도 북평사였던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관찰사 민정중(閔鼎重,호는 老峰)과 의기투합, 실종된 북관대첩의 진실을 찾아내 조정에 알렸다. 이를 바탕으로 장군에겐 좌찬성 등이 추증되고, 논공행상에서 빠졌던 의병과 그 후손들에게도 부족하나마 추증과 포상이 이루어졌다. 정문부 장군과 용맹했던 관북의병들은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와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됐다.

장군과 의병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덕분이었을까?

이단하와 민정중은 훗날 똑같이 좌의정에 오른다.

두 사람은 모두 실력있고 올곧으며 덕망있는 충신이었다. 뜻있는 신료와 선비들은 오히려 이들 두 사람이 영의정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장군의 신원(伸寃)에는 또 노봉 집안의 공이 컸다.

노봉에 앞서 그의 동생인 민유중(閔維重)이 경성통판(通判•판관)으로 있을 때 이런 사실을 알고 관북의병들의 묘에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줬다. 이 인연으로  그의 아들 민진후(閔鎭厚)는 어명으로 정문부의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는 글)을 썼고, 민진후의 아들 민우수(閔遇洙)는 장군 후손의 요청으로 농포집의 서문을 썼다. 그러니까 민씨 집안이 3대에 걸쳐 정문부 장군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셈이다.

농포를 기리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숙종때 문장으로 이름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도 북평사로 있을 때, 다시 북관대첩의 누락된 실상들을 상세히 조사, 조정의 재가를 받아 길주(吉州) 임명(臨溟)에 자신의 글로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1707년 숙종 34년의 일이다. 이에 힘입어 6년 뒤인 1713년 정문부 장군에게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정문부와 관북의병들에 대한 최창대의 평가는 명쾌하다.

"...고단하고 보잘것없는 몸을 일으켜 도망가 숨은 자들을 분발시켜 단지 충의로써 서로 감격하여 끝내 오합지졸로 전승을 거둬 한 지방을 수복한 것으로는 관북의 군대가 으뜸이다(...若起單微奮逃竄,徒以忠義相感激,卒能用烏合取全勝,克復一方者,關北之兵爲最.)"

이렇게도 늠름했던 북관대첩비는 1905년 노(露)•일(日)전쟁의 와중에서 일본땅으로 '피납(被拉)'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 전쟁에 참전해 함경도땅을 밟았던 한 일본군 부대장이 이 비석을 알아보고 일본으로 약탈해 간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그동안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시내 지요다(千代田)구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된 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일본은 장군의 태산같은 기세를 꺾겠다며 북관대첩비를 땅속에 처박는가 하면, 이 비석 위에 육중한 1톤짜리 돌덩어리를 얹어놓았다. 독립투사 조소앙(趙素昻)선생이 지난 1909년 대한흥학회보에 '북관에 대한 나의 소감'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장군이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미웠으면 북관대첩 4백여 년이 지나서도 일제가 말못하는 비석에까지 이런 비열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고 억장이 무너진다. 북관대첩비는 이렇게 처참한 신세로 한•일합방, 일제식민통치, 대동아전쟁, 해방, 한국전쟁 등 수난의 민족사를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지난 1978년 도쿄 소재 한국연구원의 최서면(崔書勉)원장 눈에 띄어 한•일 민간 및 정부간 교섭을 통해 고국을 떠난지 1백년 만인 지난 2005년에 조국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 북관대첩비의 고향인 북한으로 보내졌고, 한국에는 복제 북관대첩비가 국립박물관과 장군의 무덤가 등에 외롭게 세워져 있다.

장군을 기리는 북관대첩비마저 어쩌면 그리도 공의 기박한 팔자를 꼭 빼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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