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는 영조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다.

영남학파와 함께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기호학파의 법통을 이어받은 학자였으니, 그의 학문적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익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기호학파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을 장악하다시피한 권력의 실세였다.

그는 학덕도 높았지만 특히 제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소론세력의 득세로 조정에서 밀려난 도암은 경기도 용인의 한천(寒泉.이동면)으로 낙향, 이곳에 한천정사를 짓고 후학 양성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듣고 글줄깨나 읽었다는 수많은 선비들이 밀려들었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인 매산 홍직필의 문집인 <매산집>에는 당시의 정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도암 이 선생이 한천에서 도학을 강의하니 학문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원근의 선비들이 천여명으로 헤아려졌다(陶菴李先生講道寒泉遠近請業之士以十百計)."

​이들 도암의 제자 중에서 특히 현암(玄巖)송단(宋煓)을 중심으로 이행상(李行祥), 성덕명(成德明), 이인석(李仁錫), 이경장(李慶章) 등 다섯 명은 남달리 돈독한 우정과 철석같은 의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송단과 이행상, 그리고 성덕명은 여기에다 군자다운 덕성과 높은 학문까지 겸비, ’용인의 세 처사(仁鄕三處士)’ 혹은 ’도암 문하의 세 처사(陶門三處士)’로 칭송될 정도였다.

그 여운이 얼마나 길고 대단했으면, 순조때에 이르러 명상(明相) 남공철(南公轍)의 건의로 이들 세 명에게 사헌부 지평직을 추증했을까.

사헌부는 오늘날의 검찰과 감사원 기능을 합쳐놓은 기관에 해당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도암 문하의 1등 제자 송단은 우정과 의기로는 조선 팔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막역한 벗인 이인석의 집안이 몹시도 가난했다. 

이를 차마 지켜볼 수만 없었던 송단은 자신의 집과 그에 딸린 전답까지 그에게 빌려줬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돼 인석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 집과 전답까지 헐값에 팔아버렸다. 

주변에서 난리가 났지만 정작 송단은 태연했고, 인석 또한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도 어쩌면 그리 똑같을까.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듯이 판박이라고 할 만큼 천하태평이다.

​먼저 송단의 말이다.

"내 것이 아니었다면, 원작(이인석의 字)이 어찌 이런 일을 했겠는가.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다(非元爵之於吾則寧爲是耶 易地則吾亦然矣)."

이인석의 말도 주어와 목적어만 바뀌었을 뿐, 이하 동문이었다.

"숙하(송단의 字)의 것이 아니라면, 내 어찌 이런 일을 했겠는가.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다(非吾之於叔夏則寧爲是耶 易地則彼亦然矣)."

물질만능의 요즘 세상에선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재물과 이익을 초개같이 여기는 선비정신이 대세를 이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도 물론 흔치않은 일이었다. 

이만 하면 공자가 말한 이익이 되는 세 친구, 즉 정직하고(直), 미덥고 성실하며(諒), 박학다식(多聞見)한 친구의 범주를 포괄하고도 남을 큰 그릇이다. 

도의와 밝은 덕을 밝히고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온 당대의 군자 송단은 이런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뒤로 송단은 땟거리를 걱정할 만큼 가세가 크게 기울었지만, 늘 태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남을 대함에 차별하지 않고 화평한 기상이 넘쳐 흘렀다. 

또 주변에 누가 곤경에 처하면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 채 팔 걷어부치고 나서면서도 자신에겐 한없이 엄격한, 그야말로 춘풍추상(春風秋霜)의 군자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송단에겐 두 아들과 딸이 한 명 있었다. 마침 친우 이경장은 아들이 장가갈 나이가 되자 주저없이 송단에게 청혼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경장은 혼사문제가 매듭지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송공은 이경장의 영전에 통곡하며 "훌륭한 친구가 떠났지만, 살아 생전 친구가 한 말을 저버릴 수 없다"면서 서둘러 딸을 친구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쭉 지켜봐온 스승 도암은 송단을 칭찬하면서 "사방 백리에 이르는 제후국의 명(命)을 맡기고 (부모를 잃은)  6척의 어린 임금에게 몸 바칠 수 있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인물(綦重以寄百里託六尺許之)"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한 나라의 재상감이라는 의미다.

송공을 바라보는 당시 지식인들의 존경스런 시선 또한 이에 못지않다.

"문정공(文正公.이재의 시호)에게 현암이 있는 것은 공자 문하에 자로가 있는 것과 같다(文正之有玄巖如孔門之有子路)."

이보다 더한 찬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다만 송단이 재상을 하고도 남을 국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시대가 받쳐주지 못하고 천운이 따르지 않아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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