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선조25년) 당시 최정예 왜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부대 2만여 명이 관북(關北•함경도)지방에 발을 디딘 것은 이 해 6월 초(이하 음력)였다.

이로부터 한 달여 만에 함경도 전체는 왜적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남병사 이혼(李渾)이 철령(鐵嶺)에서 패한데 이어 한 달여 뒤인 7월18일 믿었던 북병사 한극함(韓克함(言+咸))마저 해정창(海汀倉•城津)전투에서 통한의 패착을 두고 만다. 한극함은 이일과 함께 북방을 누비며 오랑캐를 토벌해온 맹장이다.

한극함은 전투가 시작되자 천여명의 정예 기병들을 투입, 적진을 휘저으며 적을 짓밟고 베는 우수한 기병전술로 기선을 제압했다. 

겁에 질린 왜적은 허둥지둥 창고안으로 도주, 화물더미에 숨어 콩볶듯이 조총을 쏘아댔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세례에 조선군 기병들은 맥없이 쓰러졌고, 군마들 또한 고슴도치의 몰골로 속절없이 땅바닥에 나자빠져 버둥거렸다. 화공(火攻)으로 압박하지 않고 보이지않는 적을 계속 공격한 게 화근이었다. 창고 안 물건들이 아까웠으면 일단 뒤로 빠져 적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다.

날이 어두워진 가운데 조선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 남은 병력을 수습, 근처 야산으로 후퇴했으나 야음을 틈탄 왜적의 매복 기습에 혼비백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군엔 사상자가 즐비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이로써 조선의 북방 22개 주는 한순간에 왜적의 소굴로 변모해버렸다.

이 와중에서 감사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에 숨어 있다가 반적(叛賊)들에게 붙잡혀 가등청정군에게 넘겨졌으나 뒤에 가까스로 탈출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함경감사직에서 파면되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이혼은 갑산(甲山)에서 반적들에게 붙잡혀 피살됐다. 한극함도 반적들에 의해 가등청정에게 넘겨진다. 한극함은 얼마 뒤 왜적의 소굴을 탈출, 의주(義州)행재소로 달려가 관북의 실정을 아뢰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다른 지방수령들도 왜적과 반적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 모두 꼭꼭 숨어버렸다.

무법천지였다. 백성들의 생사(生死)문제는 어느새 반적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회령(會寧) 관노(官奴) 출신의 반적 수괴 국경인(鞠景仁)과 그의 숙부로 경성(鏡城) 관노였던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와 목남(木男) 등의 무리들이 사방에서 발호(跋扈)했다. 백성들끼리 서로 이간질하도록 부추기면서 소위 차도살인(借刀殺人)하는 청적(淸賊•가등청정)의 간교함이 이처럼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가등청정은 안변(安邊)을 중심으로 길주(吉州)이남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춥고 척박한 북쪽땅은 충성을 맹세한 이들 반적들에게 맡겼다.

기록에는 관북 8개 지역이 한동안 반적 손아귀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

국경인과 국세필은 관북에 피란중이던 선조의 두 아들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和君)과 이들을 시종하던 조정신하들인 상락부원군 김귀영(金貴榮)•황욱(黃彧)•황혁(黃赫) 등을 붙잡아 가등청정에게 바쳤다. 그 댓가로 받은 '선물'이 관북 8개 지역이다.

정문부는 이 때 함경북도 병마평사로 왜적과 반도들에 쫒겨 부령(富寧) 정암산(靖巖山)에 은신해 있었다. 산속을 전전하며 산나물을 캐먹고 열매를 따먹으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이어갔다. 28세의 청년으로 병마평사로 부임해온 지 1년여 만에 왜란을 당한 것이다.

반적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농사짓던 선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반적의 화살에 맞은 부상으로 몸이 성치않았다. 반적들의 눈을 피해가며 남루한 옷차림으로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용성(龍城)의 눈밝은 박수무당 한인간(韓仁간(굳셀간))이 동냥온 그를 용케도 알아보고 집안으로 모셔 극진히 예우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함경도 탈환의 일등공신으로 '사의사(四義士)'로 불리는 이붕수(李鵬壽)•최배천(崔配天)•지달원(池達源)•강문우(姜文佑)를 만난다. 

이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창의기병(倡義起兵•의병모집)의 사발통문(四發通文)이 돌자, 함경도 전역에서 수백명의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정문부 장군의 문집인 농포집(農圃集)에 실린 장계(狀啓)엔 주을온(朱乙溫)만호(萬戶•종4품邊將) 이희당(李希唐) 등 창의를 함께했던 60여 명의 동지들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들 외에 전(前)감사 이성임(李聖任)•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경흥(慶興)부사 나정언(羅廷彦)•수성(輸城)찰방 최동망(崔東望) 등과 조정신료로 피란중이던 서성(徐성(삼수변에省)), 귀양와 있던 한백겸(韓百謙)•나덕명(羅德明) 등도 가세했다. 이들뿐이랴. 산간벽지에 흩어져 있던 많은 전현직 벼슬아치들과 장사들도 속속 합류했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직급과 나이를 뛰어넘어 의병장에 추대된 정문부는 먼저 국경인•국세필•정말수•목남 등 반적 수괴들을 참수, 후방을 튼튼히했다. 민심이 안정되자 의병 세력은 순식간에 불어나 그 규모가 6천여 명에 달했다.

이를 발판으로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관북 의병들은 본격적인 왜적 토벌에 나섰다. 이 때가 9월16일이다. 이틀 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경성에 왔던 길주(吉州) 주둔 왜군 90여 명을 일망타진했다. 이를 시작으로 장평(長坪•길주소재), 쌍포(雙浦•임명(臨溟)소재), 단천(端川), 백탑교(白塔郊•길주부근)전투에서 모조리 승리했다.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적은 백탑교 등 일련의 전투에서 수천 명의 장졸을 잃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고 함경도에서 도망치듯 퇴각했다.

1593년 2월초였다. 함경도를 점령했던 왜적과 싸움을 벌인지 4개월여 만이다.

영조떼 홍문관대제학이었던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이 쓴 충의공(忠毅公) 정문부장군 신도비와 북관대첩비, 장계(狀啓) 등엔 당시 치열했던 장평전투와 백탑교전투가 잘 묘사돼 있다.

먼저 장평전투의 주요 장면을 보자.

"장평에 이르자 왜노 수괴 직정(直正)이 장수 도관(都關)및 여문(汝文)과 함께 많은 적들을 이끌고 과감하게 죽음을 무릅쓴 전면전으로 맞서왔다. 강문우와 종사(從事) 원충서(元忠恕)가 좌•우를 맡아 기병을 이끌고 들이치고 복병장 한인제(韓仁濟•防垣萬戶)가 또 번갈아 앞으로 돌격했다. 노비무리와 역졸(驛卒)들도 용감하게 분전했다....6시간의 혈전속에 아군은 우박 퍼붓듯이 화살을 쏘아댔고, 더이상 견디지못한 왜구들은 장덕산(長德山)으로 도망쳤다. 왜장 도관과 여문도 10여 발의 화살을 맞고 도주했고 사방에서 아군 복병이 출몰하며 왜적을 대파했다. 왜적의 주요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벤 왜적의 수가 8백25명이었다. 산으로 도망간 나머지 많은 왜적들은 불을 질러 태워죽였으며, 화살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져 죽은 자들은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관북의병들은 '왜적의 배를 갈라 창자를 대로에 늘어놓았으며, 이에 아군의 명성은 크게 진작되고 왜적은 더욱 두려워했다(剖其腹腸,暴之大路,於是兵聲大振,賊益畏之)'"

특히 정문부가 2만의 가등청정군과 맞붙은 백탑교전투는 두 진영의 명운을 가른 결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9개월여 뒤인 1593년 1월말의 일이다.

"가등청정은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마천령(摩天嶺)을 넘었다. 직정의 부대와 합세해 북상하고 있었다. 공은 6백명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말을 채찍질했다. 그리고 6천여 명의 장졸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吾爲國家不戰死,非忠臣也).'

모두가 하나같이 두려운 기색없이 오히려 공경하는 눈빛으로 장군의 뒤를 따랐다. 하루 종일 60여 리에 걸쳐 좌우에서 협공하며 후미를 기습하는 등 치고 빠지는 싸움을 거듭하면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그리고는 백탑교에 이르자 경기병으로 벼를 찧듯이 일거에 적을 짓뭉개버렸다. 흐르는 피는 들판을 가득 메웠다(流血盈野). 화살에 맞아 죽은 자만도 천여 명을 헤아렸다. 왜적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싣고 길주성으로 들어가 시신들을 불태웠다. 가등청정은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밤이 되자 저녁밥도 지어먹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중의 한 사람안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정평사의 쌍포 왜적격파도 뒤에 쓴 글(題鄭評事雙浦破倭圖後)'에서 이 때의 가등청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청정의 용맹과 사나움은 왜장중의 으뜸이다. 한번 북치며 철령을 넘어 북쪽땅을 유린하고 야인(野人•여진족)들의 경계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부대의 흉악함과 사나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을 만나 한 번 대패하고는 머리를 감싸쥐고 쥐새끼처럼 도망쳤다(淸正之雄勇지(執밑馬,사나울지)悍,爲諸酋之最,一鼓而踰鐵嶺蹂躪北土,至于野人之界,其兵鋒之兇猛可知也.然而遇公一敗,抱頭鼠竄)

그러면서 "정문부를 삼남(三南)의 병사(兵使)로 기용했다면, 청정이 어찌 감히 진양(晋陽)을 함락시키고 남원(南原)을 도륙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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