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 추장이 아라나에게 하사한 한족 5명 중에 전유년(田有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등주 출신으로 지략이 있어 항복한 한인(漢人)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며 따랐다. 이들은 전유년을 전백총(百摠.고위무관직)이라고 불렀다. 영철은 같은 노예인 전유년과 밤낮으로 함께 일하며 언제나 대화가 자신이 할아버지와 이별할 때 나눴던 이야기에 미치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철은 그곳에서 반 년을 사는 동안 한밤중에 도망치다가 붙잡혀 왼쪽 발 뒤꿈치를 잘렸으며, 그 후 또 탈출에 실패, 오른쪽 발 뒤꿈치마저 베여졌다. 오랑캐법에는 항복한 자가 도주하다 붙잡히면 발뒤꿈치를 자르며 세번째는 죽이도록 돼있다. 아라나는 영철이 끝내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 이를 단념시키기 위해 전사한 자신의 아우의 처를 영철에게 아내로 주었다.

​신유년(1621.광해군13년) 후금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를 심양으로 옮겼다. 아라나는 모든 집안 식구들과 함께 심양으로 이사가면서 건주의 농사일을 영철에게 맡겼다. 영철은 이 해 아들을 낳아 이름을 득북(得北.북쪽땅에서 얻었다는 뜻임)이라고 지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이 애의 이름은 득건(得建. 건주에서 얻었다는 뜻임)이었다.

을축년(1625.인조3년) 5월, 아라나가 영철에게 전마(戰馬) 3필을 보내왔다. 전유년 등 두 사람과 함께 건주강변으로 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을 잘 키우라. 가을에 말이 살찌면 나는 영원(寧遠)으로 싸우러 갈 것이다. 그 때 너도 데려가마." 

한편으론 은밀하게 이런 부탁도 했다. 

"너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다. 그래서 너는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저 두 야만인은 장차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너는 마음을 써서 잘 지키라."

​이 때 건주에는 심양에서 와서 말을 먹이는 만주족들도 많았다. 영철.유년과 항복한 한인(漢人) 7명은 함께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영철은 잠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크게 반기며 술과 고기를 마련해 영철과 함께 먹고 마셨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아내는 문을 나서는 영철을 전송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당신이 싸움터로 나갈 날이 멀지 않았네요. 또 당신과 이별해야겠네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술과 고기를 영철에게 싸주면서 가지고 가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고 했다.

한인 포로들도 영철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오자 크게 기뻐했다. 이들은 서로 둘러 앉아 술 마시고 노래하며 즐겼다. 이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땅에는 달빛이 가득했다. 유년은 달을 우러러보고 좌중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이 달이 응당 우리 부모처자에게도 비칠 것이요, 우리 부모처자도 이 달을 바라보며 반드시 우리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고 통곡했다. 유년은 또 영철에게 "너는 부모가 조선에 있지만, 여기에 이미 처자식이 있으니 돌아갈 생각을 하는 우리와는 처지가 다르겠구나"라며 영철의 의중을 떠봤다. 하지만 영철의 대답도 이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짐승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하거늘, 어찌 이국 땅에 처자가 있다고 해서 내 부모를 잊겠는가? 고국으로 살아 돌아가 한 번이라도 부모를 뵐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두 번이나 도망치다가 붙잡혀 곤욕을 당했으니, 이번에 만일 도망치다 발각되면 반드시 죽을텐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유년이 다시 화답했다.

"요양의 길은 이미 막혔다. 듣자하니 너희 나라 사절단이 배를 타고 등주를 거쳐 황도(북경)에 이른다고 하던데,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도망쳐 등주에 도착하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너도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떤가? 해볼 뜻이 있는가?"

영철이 "계책을 장차 어떻게 짤 것인가?"라고 묻자, 유년이 또 대답했다.

"내가 오랫동안 명나라 정벌군을 따라다녀 오랑캐 땅의 산천 형세를 익숙하게 알고 있네. 우리가 기르고 있는 이 말들은 천리마일세. 이 말을 타고 가면 불과 4-5일이면 반드시 도착할 걸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유년은 그러나 영철이 주저하며 연연해하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영철에게 약속했다.

"나에게 예쁜 여동생이 둘 있는데, 집으로 돌아간 뒤 큰 애가 시집갔으면, 작은 여동생이라도 반드시 너에게 시집보내겠다"

영철과 유년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술에 타 함께 마시고 달에 절하며 맹세했다. 각자 5일치 식량을 가지고 열 사람이 말에 올랐다. 한밤중이었다. 말을 키우는 자들은 모두 잠들고 사방을 돌아봐도 인적이라곤 없었다. 곧바로 거센 강물결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나갔다. 또 다시 깊은 여울을 만났다. 말채찍을 휘두르며 어지러운 물길을 건너다가 초병에게 발각됐다. 오랑캐 병사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추격해왔다. 허겁지겁 쫓기던 이들은 큰 늪에 빠졌다. 다행히 여섯 명은 말을 탄 채 무사히 빠져나왔으나 4명은 말과 함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살아 나와 6명을 뒤따랐다. 정신없이 1백여 리를 달리다 보니 날이 훤히 밝았다. 높은 지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들판 곳곳에 오랑캐 장막들이 많았다. 큰 산기슭으로 몸을 피해 말에서 내려 쌀을 씹으며 물을 마셨다.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울면서 무사 귀환을 달님에게 빌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백여리를 달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을 가로질러 옛 전장을 지나갔다. 도중에 깨진 화로를 얻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다. 다시 빠르게 달려 나가자 어느새 동트는 새벽이었다.

산천을 둘러보던 유년의 얼굴에 희색(喜色)이 번지면서 나지막한 어조로 동지들을 안심시켰다. "여기는 이미 요양과 심양을 등진 곳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식이 떨어진 것이다. 앞서 늪에 빠졌을 때 이들 6명은 목숨은 건졌지만, 양식의 절반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잘 따라와준 주인 잃은 말을 잡아 배를 채웠다. 남은 고기는 각자 나눠 말머리에 매달았다. 이틀 밤낮을 더 달려서 영원에 도착했다. 명나라 척후병들이 오랑캐 기병 복장을 한 이들 6명을 보고 오랑캐 병사로 간주, 수십명의 기병이 쫓아와 포위하고 죽이려고 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때마침 이들 중 한 명이 척후병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형임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형을 불렀다. 그의 형은 놀라 즉시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이들이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명나라 조정은 황제의 명으로 영철에게 옷과 식량, 돈 백금(百金)을 하사해 집을 사고 장가들 수 있게 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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