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철은 유년을 따라 등주로 갔다. 영철이 유년의 집에 머문 이후 많은 날들이 흘렀다. 영철의 마음은 늘 울적하고 즐겁지 않았다. 유년의 작은 여동생은 이 때까지도 미혼이었다. 유년이 마침내 음식을 크게 장만하여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밤이 되자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유년과 영철은 오랑캐에게 붙잡혀 포로생활하던 시절의 일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뿌렸다. 이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유년은 손으로 술잔을 잡고 달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부모님 앞에서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제가 오랑캐들에게 포로로 잡혀있을 때, 영철이 없었으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일찌기 저는 영철에게 여동생을 주기로 달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지금 그 달이 여전히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침내 유년의 부모님도 아들의 뜻을 받아들여 작은 딸을 영철에게 시집보냈다. 유년의 여동생은 영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남들은 시집가면 시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올리는데, 저만 그렇지가 못합니다. 화공(畵工)을 불러 시부모님의 초상을 그리게 해주세요."

​영철은 아내의 부탁을 받자 곧바로 화공을 불러 자신의 부모님 용모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과 특징들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화공의 솜씨는 노련했다. 짧은 시간 안에 실물을 판에 박은 듯한 영철 부모님의 초상이 완성됐다. 영철의 아내가 된 유년의 여동생은 초상으로나마 첫 대면한 조선의 시부모님께 공손하면서도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단 꿈에 젖은 행복한 나날이었다. 인근에서 연회(宴會)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영철을 초청해 조선의 노래와 춤을 청했다. 영철은 남달리 노래와 춤에 능했다. 영철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좌중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공연이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비단을 선물로 놓고 갔다. 이 덕분에 영철의 집안 형편은 갈수록 나아졌다. 그 사이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장남의 이름은 득달(得達)이고, 차남은 득길(得吉)이었다. 두 아들의 이름이 상징하듯이, 영철의 삶이 만주에서의 오랑캐 포로 시절과 달리, 막힌 곳에서 통한 곳으로 나아가고 흉(凶)이 길(吉)로 바뀌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경오년(1630.인조8년) 겨울 10월이었다. 조선의 진하사(進賀使)가 탄 배가 등주에 정박했다. 마침 이 배의 선원인 이연생(李連生)은 영철과 동향(同鄕)인 영유현 사람이었다. 영철이 그를 만나러 갔다. 배에 다가가서 연생을 불렀으나 배 위에 있던 연생은 처음엔 영철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이었다. 한참 만에야 그가 영철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10여 년 전에 심하전쟁에 나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영철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영철도 고향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과 반가움은 잠시 뿐. 그로부터 집안 소식을 전해듣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비통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부친은 안주(安州)에서 전사하셨고, 자신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던 할아버지는 지난번 심하전투에서 오랑캐에게 붙잡혀 살해된 종조부(작은 할아버지) 영화(永和)의 아들인 이룡(爾龍)에게 의탁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친정인 소호(蘇湖)로 돌아가 얹혀 살고 계셨다. 자신이 명나라 지원군으로 출정한 뒤 소식이 끊기고 부친마저 안주에서 전사한 뒤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風飛雹散)난 것이다. 영철은 한동안 대성통곡했다.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된 채 영철은 연생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내가 오랑캐 포로 생활중에 도망쳐 살아나오기까지 만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네. 온갖 모진 고통을 참아내며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서네. 이제 천운으로 친구를 만났으니, 원컨대 친구는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게."

영철은 마침내 친구와 굳게 약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영철의 얼굴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다음 해 봄이 되자 조선 사신 일행이 다시 등주에 왔다. 내일 조선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이날 밤 아내는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집안에 불을 환히 밝히고 영철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동정을 살폈다. 영철은 혼자 생각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곁에 있는 처자식을 돌아보니 차마 이들을 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크게 흔들려 결심이 서지 않았다. 술을 찾아 연거푸 여러 잔을 들이켰다. 아내에게도 술을 권했다. 아내는 이내 술에 취해 잠들어버렸다. 영철은 그 틈을 타서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곧장 연생이 타고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연생은 배의 장판(障板)을 뜯고 영철을 장판 아래 숨게 한 뒤 다시 장판에 못질을 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다음날 새벽 동틀 무렵이 되자 아내는 득달같이 1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배안을 다 뒤지며 영철을 찾았으나 영철은 어디에도 없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영철의 소재를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영철은 장판 밑에서 크게 고함치며 사람을 불러댔다. 배 안 사람들이 이에 놀라 재빨리 영철을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먹을 음식과 갈아 입을 옷도 줬다. 사흘 뒤 배는 평양 석다산(石多山)부두에 닻을 내렸다.

영철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달음에 영유현 고향집으로 달려갔으나 그 곳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 영가가 의탁하고 있는 당숙 이룡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 앞에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 있던 할아버지 영가(永可)는 영철이 나타나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레져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영철이냐?"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서럽게 흐느꼈다. 이룡과 그 집안 식구들도 영철에게서 영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처럼 안타깝고 슬픈 상봉을 지켜보던 이웃 사람들도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다같이 울었다. 영가는 영철을 데리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소호로 갔다. 영철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 이르자 먼저 집안으로 뛰어들며 "어머니, 저 왔어요."라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어머니, 아들 3대가 다시 얼싸안고 목놓아 울었다. 영철이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기쁘고 다행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크고 깊었다. 마을은 텅빈 듯 쓸쓸했고, 집안 식구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떠돌았다. 가업이 무너져 스스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살아갈 일이 걱정돼 길을 가다가도 울 정도로 하루하루가 눈물바람이었다. 이런 판국에 영철을 유심히 지켜봐 온 사람이 있었다. 영철의 고향인 영유현에 사는 이군수(李群秀)라는 사람으로 살림살이도 꽤 넉넉한 편이었다. 그가 영철이 효자라며 자신의 딸을 영철에게 시집보냈다.

병자년(1636.인조14년) 가을이었다. 연생은 또 사신 일행이 탄 배를 따라 등주로 갔다. 영철의 처가 유년과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영철의 소식을 물었다. 연생은 한사코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 다음 해 조선 사신 일행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등주에 왔다. 영철의 처는 또 연생을 찾아와 애처롭게 사정했다.

"내 듣기로 조선은 이미 오랑캐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 항로도 곧 끊어질텐데 그 대는 제발 사실을 말해 나의 한맺힌 마음을 풀어주세요."

​연생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영철의 귀국에 얽힌 이야기를 다 털어놨다. 유년은 크게 탄식하며 "영철은 대장부다. 기필코 그 뜻을 이뤘구나."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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