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동안 계속된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은 막강한 청나라 군을 딱 두 차례 격파했다. 하나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金俊龍)장군의 부대가 수원 광교산(光敎山)전투에서 청군을 대파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장군(1581-1643)이 김화(金化) 백전(柏田) 능선 싸움에서 거둔 승리다. 이 두 곳의 승리는 이미 기가 꺾인 조선군의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조선전사에 한 획을 그은 값진 개가였다.  

  이제 유림장군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유공은 이미 56세의 노장이었다. 23세 때인 선조 36년(1603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광주(廣州)목사, 영변(寧邊) 도호부사, 충청.전라수사, 황해.평안.경상좌병사, 통제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포도대장 등 주요 내외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바로 이 해 초에 3번째로 평안도 병사를 맡아 안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안주성은 평양과 직결된 북방 주요 요충의 하나다. 특히 지난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정예병력 3만여 명의 침공에 맞서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 안주목사 김준(金浚), 귀성(龜城)도호부사 전상의(全相毅), 강계(江界)부사 이상안(李尙安) 등 휘하 조선군과 안주 백성 등 민관군이 하나가 돼 혈전끝에 옥쇄한 아픔과 통한이 서린 곳이다. 유공이 평안병사로 3번째나 이곳에 부임해 갔을 때는 정묘호란이 끝난 지 9년이 지났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조정에 대한 불신과 전쟁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유공은 앞서 두 번의 평안 병사 시절 백성들에게서 받았던 호평과 신뢰를 바탕으로 갈라진 민심을 빠르게 수습했고, 백성들 또한 그를 믿고 잘 따라줘 백성과 군사들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청나라 오랑캐들이 머지않아 다시 공격해올 것으로 보고 무너진 성채 보수와 총포 제조, 군량미 비축, 군사조련 등 이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이 해 12월 초순(이하 음력) 청나라 대군 1진 2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넌데 이어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이끄는 본진 7만여 명이 이달 14일 안주성에 이르렀다. 공은 적의 병력이 정예기병만 4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이라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수성에 치중하다가 기회를 틈타 후미를 기습, 타격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장졸들을 엄히 단속하며 수성전에 대비했다. 이미 해자도 넓고 깊게 파 적병과 말들의 접근을 막고 부근에 성도 새로 쌓았으며 흐르는 강물을 끌어들여 예상되는 식수 부족을 해결한 뒤였다. 식량도 넉넉히 비축,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준비를 갖춰놓은 터였다. 

  성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부끼는 깃발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큰 낙타를 타고 성 위를 유심히 살피던 청태종 홍타이지는 휘하 장수들을 돌아보며 "대군이 성밖에 이르렀는데도 이와 같이 조용하니, 이 성을 지키는 장수는 반드시 지략이 있을 것이다. 공격해서는 안된다(大軍臨城,安靜如此,守城之將,必有智略,不可攻)"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성밖에 풀을 쌓아놓고 바람결을 이용해 불을 놓아 연기가 나가는 곳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으니, 이는 공이 추격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연막탄을 터뜨린 셈이다. 이 때 안주성은 조정과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공은 근왕(勤王.임금에게 충성을 다함)할 계책을 세운 뒤 영변(寧邊)부사 이준(李浚)에게  "움직이지 말고 안주성을 굳게 지키라"고 단단히 당부하고 5천여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1596-1637)와 만나기로 한 뒤였다. 두 사람이 이끄는 조선군은 다음해인 1637년 정월 26일 김화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곳을 지나며 약탈하는 오랑캐 무리와 맞닥뜨렸다. 재빨리 정예병들을 출동시켜 수십명의 오랑캐 수급을 베고 이들에게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했다. 빼앗겼던 가축들도 되찾았다. 이튿날 아침 척후병의 보고가 다급했다. 10리 밖에 대규모 적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은 홍 감사에게 김화현 북쪽 산성에 함께 들어가 적과 싸울 것을 제안했으나 홍감사는 이를 거부했다. 공은 다시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양군이 반드시 합쳐야 거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홍 감사는 또 이를 뿌리쳤다. 홍 감사는 먼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나가 김화현 남쪽의 탑곡(塔谷)에 진을 쳤다. 공은 탑곡의 지세를 살핀 뒤 "이곳은 지대가 낮고 평탄하여 적이 진입하기 쉬우니 높은 곳으로 옮기는 게 낫다"고 일러주었다. 홍 감사는 이 권고마저 듣지않은 채 다만 진지 뒷면이 휑한 것만을 걱정했다. 공은 달리 어쩔 수가 없어 그 결함을 보완하라고 휘하 병력 2백여 명을 보내주고 자신은 그 왼쪽 백전(柏田)능선에 진영을 잡았다. 이 능선은 삼면이 깎아지른듯이 험하고 나머지 한 면은 산과 이어졌으나 그 가운데가 벌허리처럼 잘린 듯 잘룩했다. 공은 나무숲에 의지해 병력을 배치하고 견고하게 목책을 세웠다. 다음 날 날이 샐 무렵 적이 먼저 홍 감사 부대가 진을 친 탑곡 전면을 치고 들어왔다. 쌍방간에 밀고 밀리는 공방이 3-4차례 거듭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랑캐 기병 수천명이 뒷산으로부터 단숨에 짓눌러버릴 것처럼 쳐내려왔다. 그 기세가 질풍노도 같아 대번에 아군 양  진영이 둘로 잘려버려 서로 구원할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군 오른쪽 진영이 무너지고 애석하게도 충신 홍명구는 전사한다. 이 때 그의 나이 42세. 한창 일할 나이로 평안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훌륭한 방백이었다. 근왕을 위한 출병을 둘러싸고 유공과 이견을 빚어 따로 진을 쳤던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홍 감사나 유 병사나 모두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친 충신이다. 다만 방법론이 달랐던 사고의 차이가 두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홍 감사는 조정으로부터 근왕의 명이 떨어지자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충신의 길을 택했고, 유 병사는 장수로서 오랑캐와 지혜롭게 싸워 승리함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했을 뿐이다. 

  적군은 승세를 타고 공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패전한 아군 병사들과 적군들이 뒤섞여 밟히고 쓰러지며 밀려드는 와중에서 개천(价川)군수 구현준(具賢俊)이 전사하고 공의 진영 병사들 또한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이 높은 곳에 말을 세우고 서서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我在此無動)"고 일갈하자 비로소 장졸들이 제자리를 잡고 늘어서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지세상 아군은 굽어보고 적군은 우러러보는 유리한 형국인데다 잣나무 숲이 빽빽해 오랑캐 기병들이 뚫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화살 또한 쏘아봤자 나무에 박힐 뿐,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아군은 이처럼 유리한 형세를 최대한 이용해 그 틈 사이로 포를 쏘아 한 발에 서너 명씩을 명중시키니 적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일단 퇴각했다. 

  장군은 다시 대오를 갖추고 진영을 정돈한 뒤 장병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화살과 탄환이 많지 않다. 낭비해서는 안된다. 적들이 우리 진지 앞 수십보 가까이  접근하면 내가 마땅히 깃발을 휘두를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깃발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일제히 발사하라. 이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참형에 처할 것이다." 

이 명령이 떨어진 뒤 적들은 병력을 나눠 차례로 진격해왔지만 그 때마다 모두 전멸시켰다. 적들의 시체가 목책 높이 만큼 쌓였다.  날이 저물자 적들은 총공격을 감행해왔다. 백마를 탄 적장이 위 아래를 치달리며 적군을 지휘했다. 장군은 10여 명의 결사대를 뽑아 은밀히 목책 밖으로 내보냈다. 쏜살같이 뛰쳐나갔던 이들은 순식간에 정확한 조준사격으로 적장의 명줄을 끊어버렸다. 사살된 적장은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다. 훗날 전쟁이 끝난 뒤 청태종의 누이는 남편의 원수를 갚게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댔지만, 홍타이지는 끝내 이를 뿌리쳤다고 한다. 청태종의 사람됨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하루 종일 계속된 치열한 싸움이었다. 우리 군사들은 녹초가 돼 있었다. 후미에서는 더 이상 못버티고 도망치는 병사까지 나왔다. 장군은 다시 풍악을 울리라는 명을 내렸다. 승전을 알리는 풍악을 울려 장병들을 격려했다. 장졸들은 심기일전했고 사기가 크게 올랐다. 날이 어두워진 뒤 적들은 마침내 물러났다. 정탐병의 보고는 불길했다. 오랑캐군 진영에서 곡소리가 진동하고 있으나 구원군이 계속 이어져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도 화살과 탄환이 바닥나 더 이상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은 철수를 결정했다. 샛길을 이용, 남한산성으로 달려갈 참이었다.

사책인 '국조인물고'에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군중에 명하여 부서진 총을 거두어 탄약을 장전하고 화승줄을 매달되, 그 길이를 들쭉날쭉하게 한 다음 그 끝에 불을 붙여 잣나무 숲 여기저기에 걸어놓고 떠나가게 하니, 밤새도록 포성이 계속 울려 적이 감히 가까이오지 못했다. 날이 밝은 뒤 대거 몰려왔으나 조선군 진영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적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공은 군사들을 온전히 하여 낭천(狼川)으로 달려가 군비를 정돈한 뒤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화친이 성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 밖에 나아가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본래의 직임으로 진영에 돌아가라는 명을 받았다."      

  공은 체격이 작았으나 당찼다. 특히 지략이 출중하고 인품이 훌륭해 백성과 군사들이 따랐을 뿐만 아니라 오랑캐 장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이 김화에서 승리를 거두고 안주성으로 돌아오자 안주성에는 청나라 군대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청나라 구왕(九王)으로 우익군의 총사령을 맡았던 도르곤(多爾袞)이 공의 명성을 듣고 공을 만나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도르곤은 공을 만난 뒤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지 최고의 군마 2필을 보내왔다. 도르곤은 청태종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이다. 홍타이지가 1643년 명나라 정복 1년을 앞두고 급사하자 섭정에 나서 나어린 순치제(順治帝)를 도와 마침내 중국 통일을 이룩한 청나라의 영웅이다. 병자호란 패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昭顯)세자와도 각별하게 친분을 나눴다고 한다. 도르곤은 사후에 의황제(義皇帝)로 추대됐다. 형인 홍타이지 못지않게 대단한 군주의 기상을 가졌던 도르곤이 흠모한 조선의 장수가 바로 유림이다. 그렇다면 공의 인품과 장수로서의 무재(武才)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익히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는가. 휘하 참모들은 공에게 즉시 가서 사례할 것을 건의했으나 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도르곤을 만나러 갔다. 공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었다. 수행하는 수백 명의 장병들에게 품속에 전립(氈笠)을 하나씩 넣어 가도록 하고는 그 이유를 말해줬다. "내가 구왕과 말을 나누거든 너희들도 구왕을 따라온 적병들에게 술과 쇠고기를 대접해 기어이 흠뻑 취하게 하라. 그런 뒤 우리가 돌아올 때에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간 전립을 씌워 데려와라."

공의 이 계획은 성공했다. 오랑캐들은 술이 깬 뒤 깜짝 놀랐으나 아무도 감히 따지지 못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공이 평안병사를 하고 있을 때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오랑캐 장수인 용골대(龍骨大)와 마골대(馬骨大)가 기병을 이끌고 안주성으로 와 명나라 사신을 사로잡아 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공이 이들이 맹약을 저버렸음을 엄히 꾸짖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을 보이자 두 오랑캐 장수가 공의 기세에 눌려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 돌아갔다고 한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공과 백마산성의 임경업(林慶業)을 조선장수 중 으뜸으로 보고 명나라 공격에 두 장수를 보내줄 것을 조선 조정에 뻔질나게 요구했지만 그 때마다 공은 병을 핑계대고 곤경을 모면하곤 했다. 한 번은 더 이상 핑계댈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서 명나라 정벌전에 참전한다. 하지만 그 때도 역시 병을 구실로 머리싸고 누워버렸다. 대신 부장에게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면서 명나라군을 향해 실탄을 빼고 공포탄을 쏘게 했다가 들통나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며 백마산성을 지키고 있던 임경업장군은 청나라군이 백마산성을 피해 가며 그 주변과 예상 추격로에 겹겹이 대군을 배치, 발을 묶는 바람에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뒤 돌아가던 오랑캐 후미를 타격해 수백명을 주살하는데 그쳤다.

  명(明)-청의 틈바구니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다 백마산성에 안치되는 등 노년에도 바람 잘 날 없이 풍파를 겪었던 유공은 1643년(인조21년) 또 다시 포도대장에 임명됐으나 병부(兵符.임명장)를 받기 전 병이 깊어져 숨을 거둔다. 향년 63세.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선생은 공을 이렇게 추모했다.

"저 옛날 병자년과 정축년에 큰 오랑캐가 동쪽을 침범하니..(중략) 씩씩한 유공이 이때 서쪽 변방의 장수가 되었는데,  군대를 규합해 근왕해서 백전에 이르러...(중략) 적을 구름처럼 많이 죽였네. 적장을 효시하니 위엄이 오랑캐들을 두렵게 하였네. 저 모든 패장들이 어찌 공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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