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주의 왜적 잔당들은 장평전투에서 혼쭐이 난 탓인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한동안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관북 의병들은 공격 목표를 바꿨다. 길주성에서 몇 리씩 떨어진 사방 4-5곳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성 안 적들의 동태를 계속 감시하면서 먼저 남쪽의 영동 책성을 쳐부순 뒤 길주성을 도모키로 했다. 이듬해인 1593년 1월초. 정문부의 삼위군(三衛軍)은 책성 인근 쌍포(雙浦)에서 임명(臨溟) 민가들을 분탕질하고 돌아오던 왜적들을 만나 1백여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선 길주 토박이 복병장 김국신(金國信)과 육진의 정병(精兵)출신 의병들이 공을 세웠다. 이들이 특히 참수한 왜적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10여 리 길에 늘어놓고 항복을 권하는 섬짓한 격문을 보내자 왜적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책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 격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장평에서 벤 귀가 무수하니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치는 놈들이 될 것이요, 쌍포에서 벤 고환이 심히 많으니 이는 단지 살았을 때의 남자일 뿐이다.(長坪之割耳無數,應作死後之逃奴,雙浦之割勢甚多,只是生前之男子)"

이 달 28일 이른 아침이었다. 임명 들판에서 길주성으로 향하는 대병력의 왜적들이 아군 감시망에 들어왔다.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진 길주성을 구원하려는 가등청정의 부대였다. 병력수가 어마어마했다. 족히 1만여 명은 될 듯 했다. 왜적의 수는 단천(端川) 근처 이성(利城) 주둔 2천 여명과 길주와 영동 책성의 병력을 합치면 2만 명 정도라는 정문부의 장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백탑교(白塔郊) 혈전이 시작된 것이다. 복병장 훈련정(正) 구황, 첨정 박은주, 첨사 강문우, 판관 인원침•고경민, 정로위(定虜衛.양반출신 오랑캐토벌대) 김국신 등이 의병들을 이끌고 왜적의 뒷꽁무니를 집중 타격하며 접전을 벌였다.

의병장 정문부는 삼위군의 정예기병 6백여 명을 이끌고 왜적의 전방을 차단하는가 하면, 갑자기 뒤로 빠져 적들의 허리를 끊어 적진을 혼란에 빠뜨렸다. 관북 의병들은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안, 전후좌우에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유격전을 벌이면서 왜적들을 결전의 장소로 몰고 있었다. 새벽 7시부터 시작된 아군의 이와 같은 유인•추격전은 60여 리에 걸쳐 계속됐다. 길주성 외곽 20리쯤 되는 곳에 매복해있던 훈련판관 원충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출 접전을 벌이면서 경기병으로 왜적의 후미를 괴롭혔다.

날쌘 관북 기병들은 왜적을 상대로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는 좌우에서 협격하고, 좁은 곳에서는 적의 후미를 집중공략했다. 정문부는 왜적과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종사관 이성길(李成吉)을 통해 각 진영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최종 목표지점에 올 때까지 접전을 그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왜적 주력부대와의 거리가 십수보로 좁혀지자 아군의 화살과 쇠뇌가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관북의 날래고 용감한 기병들은 맘껏 적진을 헤집으며 유린했다. 추위에 단련된 우리 의병들은 엄동설한에 손과 몸이 굳어버린 왜적들을 썩은 나무 등걸 자르듯이 닥치는대로 베었다. 삭풍 휘몰아치는 백탑교 들판에는 낭자한 핏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영하 4-5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酷寒)속에 흐르는 핏물은 곧바로 흙에 엉긴 채 얼어붙어 검붉은 빛깔의 빙판으로 변해버려 기괴한 분위기를 토해냈다. 12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백탑교의 피튀기는 싸움은 밤이 돼서야 끝이 났다.

가등청정은 천여 명의 부하를 잃고 저녁밥도 거른 채 그날 밤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정문부의 용병술은 예측불허•난공불락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가히 천재적이다. 백성과 병사들의 신뢰, 장수로서의 훌륭한 인품과 위엄, 후방 안정은 기본이고 전략•전술 운용에서도 귀신을 홀릴 정도의 신기( 神技)를 휘둘렀다. 적은 병력으로 막강한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첩보 및 정보의 활용, 매복과 기습, 그리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지구전으로 적의 힘을 빼놓고 마지막 목표지점에서  총력전으로 적을 부수는 유격전의 대가(大家)였다. 때로는 잔혹한 응징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공포심을 심어주며 민가 약탈과 부녀자 겁탈에 대한 끔찍한 복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지형지물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승리에 한 몫 했다. 

특히 겨울철 함경도의 살을 에는 강추위와 폭설, 찬바람 등 기후적 특성에 착안, 추위에 약한 왜적을 이 시기에 집중공격해 연전연승한 것은 정문부 용병술의 진수(眞髓)이자 백미(白眉)다.

정문부가 구사한 이와 같은 전법(戰法)은 병법(兵法)의 전범(典範)으로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손자(孫子)병법》 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손자병법의 핵심인 이른바 '오사칠계(五事七計)'로 따져 보더라도,  정문부의 지략(智略)은 이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병력과 훈련의 현저한 열세를 딛고 탁월한 전술로 왜적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의 '오사칠계'는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내용이다. 

먼저 '오사'는 도(道)•천(天)•지(地)•장(將)•법(法)을 말한다.

이를 풀어보면, △ 누가 올바른 명분과 정의를 가졌는가(道)? △천시(天時)에 합당한가? △지리적으로 유리한가(地)? △장수는 적장을 능가할 정도로 유능한가(將)? △군법 등 법규는 합당하게 시행되는가(法)?의 의미다.

또 '칠계'는 '오사'에 세 가지를 더한 것으로,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돼 있는가? △상벌은 누가 더 분명한가? 등이다.

2차 대전 뒤 중국대륙을 차지한 모택동(毛澤東)이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즐겨 썼다는 소위 '16자 병법'은 정문부의 귀신같은 용병술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즉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나는 후퇴하고) △적주아요(敵駐我擾. 적이 머물면 나는 소요를 일으키며) △적피아타(敵避我打. 적이 피하면 나는 치고) △적퇴아추(敵退我追. 적이 물러나면 나는 추격한다)는 병법의 원론적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정문부의 이런 '신출귀몰(神出鬼沒)병법'은 부패한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이긴 중국 공산당의 유격전과 월남전을 승리로 이끈 보 구엔 지압 월맹 국방장관의 게릴라 전술에도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 등 조선의 명장들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계속해왔다는 점에서 그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정문부 장군의 이 같은 전술•전략이 적어도 오늘날의 재래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3백여 년 전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도 장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공은 일을 생각함이 정밀하고 밝았으며, 적을 헤아림이 신과 같았다. 특히 사람을 잘 알아봐 각기 그 재능에 알맞게  썼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잊고 쓰임받기를 좋아하여 끝내 수천의 외로운 군대로 강성한 정예 왜구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뛰어나겠는가. (公慮事精明,料敵如神,尤善於知人,用各當才,故人皆忘死而樂爲用,卒能以數千孤軍,擊却方張之銳寇,雖古名將,何以過此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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