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용(金俊龍•1586-1642)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이다.

1636년 12월(이하음력) 청(淸)나라 대군의 침입으로 조선의 백성과 강토가 피로 물들일 때 조선군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광교산(光敎山)전투에서 승전보를 전했다. 그 주역이 바로 김준용 장군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조선의 패배와 이에 따른 인조의 항복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패전의 꼬리표가 따라붙는 빛바랜 승리라고 해서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 먼저 병자호란의 시종(始終)을 대략 살펴보면 그의 승리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을 침공한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8개월 전인 이 해 4월, 국호를 후금(後金.원래는 大金)에서 청나라로 바꾸고 숭덕(崇德)이란 연호까지 쓰며 제국의 황제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청군의 기세는 사납고 무서웠다.

병력 규모도 정예 기병을 위주로 12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9년 전 조선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긴 정묘호란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청나라가 동원했던 이 때의 병력수는 기록상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자체 병력(기병) 7만여 명을 비롯해 몽고군 3만 명, 그리고 항복한 명(明)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이끄는 2만 명 등 모두 12만여 명이었다.

여진족을 주축으로 몽고족과 한족(漢族)이 가세한 혼성부대다. 이는 강성해진 여진족이 몽고족을 복속시키고 쇠락한 명(明)나라마저 자신들의 영향권에 넣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8년 뒤인 1644년 명나라는 청나라에 정복된다.

청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다시 짜던 시기였다.

병자호란은 바로 이런 격동기에 일어난 전쟁이다.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고 세폐(歲幣.선물)를 증액하며 정병 3만 명과 전마 3천 필을 보내라는 청의 요구를 조선이 묵살함에 따라 촉발된 전쟁이었다. 한겨울 강추위 속에 조선의 북부와 한양, 경기지역 등지에서 45일 동안 계속된 전쟁이었지만 그 댓가는 무척이나 혹독했다. 

전쟁 자체가 최악의 재앙이고 불행과 비극의 총합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병자호란 만큼 참혹하고 치욕적인 전쟁이 또 있었을까?

1637년 1월30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으로 불리는 조선의 항복은 못난 임금 인조와 그의  무능한 신하들의 탓이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사냥꾼에 쫓기는 겁에 질린 들짐승처럼 오랑캐의 먹잇감이 돼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며 비명지르고 울부짖으며 죽어가야 했던 저 수많은 백성들은 무슨 죄인가. 

숱한 약탈과 겁탈도 모자라 전승국의 전리품으로 오랑캐에게 강제로 끌려간 저 가련한 수십만 조선 여인들의 원통함은 무엇으로 풀어줄 수 있을까. 저들의 통곡과 통한은 아직도 이 땅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

차마 떠올리기조차 싫은 이 아프고 슬픈 참상들을 지금 다시 되뇌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비극을 결코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고자 해서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인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은 늘 잠재적 현재진행형이다.

위정자들이 부패하고 무능•무식하며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입에 담기조차 싫은 병자호란 같은 참화는 또 찾아오기 마련이다.

국민은 예나 지금이나 똑똑하다. 문제는 역사를 망각하고 국민을 배신하는 권력의 오만함이다.

역사가 이를 웅변한다. 권력이 역사를 직시하고 민심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정상궤도를 순항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이 해 12월8-10일. 선봉대인 마부태(馬夫太) 휘하 기병 6천명이 8일 처음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그 뒤를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가 이끄는 좌익군 기병 2만4천명과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衮)의 우익군 기병과 보병 2만2천명이 따랐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지휘하는 본군 7만여 명은 10일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면서 의주(義州), 용천(龍川), 곽산(郭山), 선천(宣川), 정주(定州) 등지에 일정 병력을 잔류시켜 조선군의 추격과 반격을 묶었다.

당시 조선군은 영의정 김류(金瑬)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주도한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에 따라 도원수 김자점이 5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황주(黃州)의 정방산성에 주둔한 것을 비롯해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의 철옹산성 3천명▲평안도병사 유림(柳琳)의 안주성 3천명▲청북(청천강북쪽) 방어사 임경업(林慶業)의 백마산성 3천명으로 각각 포진하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 견지해온 지역중심 방어체제를 버린 후과는 심대했다.

적의 주요 침공로인 의주 등 전략적 요충들을 무주공산으로 비워놓고 또 다른 최고의 요충인 안주성마저  병력 열세로 인한 공수의 기동성 약화를 감수해야 했다. 청나라 대군은 의주를 무사통과한 뒤 무방비상태의 군사적 거점들만을 골라가며 무인지경의 남하를 재촉했으니,  결국 산성 중심 방어전략이 결정적 패착이 된 셈이다.

청군은 질풍노도처럼 몰아쳤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조선군은 요소요소에서 적을 막아섰지만 한마디로 추풍낙엽이었다. 적의 선봉인 마부태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지 5-6일 만에 도성을 압박했다. 청나라 대군의 침입을 알리는 도원수의 장계가 처음 조정에 전해진 것은 12월13일. 이 때 적은 이미 평양을 지나 경기도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정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했다. 놀란 인조와 조정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 사태 수습에 머리를 맞댔지만, 여기저기서 한숨과 비탄, 원성이 그치질 않았다. 청군은 16일 어느새  남한산성까지 쫓아와 성을 에워싸고 성으로 통하는 사방 통행로를 봉쇄했다.

인조는 고립무원의 절망감 속에서 전국 8도의 감사와 병사, 수사에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근왕병(勤王兵)들을 불러모으라는 유시를 내렸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와 공주(公州)영장 최진립(崔震立), 원주(原州)영장 권정길(權正吉) 등이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중도에서 적을 만나 대패했다.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은 휘하 대병력에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와 그 병력까지 가세, 광주(廣州) 쌍령(雙嶺)고개에서 청나라 기병들과 결전을 벌였으나 세 장수가 모두 죽고 군사들이 궤멸되다시피하는 참패를 맛봐야했다. 여기에는 아군 진영에서 발생한 화약사고가 패배를 부른 결정적 실수로 작용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함경감사 민성휘(閔聖徽)와 남병사 서우신(徐祐申)은 진군로를 둘러싼 이견으로 근왕이 지연됐고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경상감사 심연(沈演)•수군통제사 윤속(尹㬘)•전라우수사 성하종(成夏宗)•좌수사 안몽윤 (安夢尹)•통우후 황익(黃瀷) 등은 마지못해 군사는 움직였지만 이미 겁을 먹고 주변만 맴돌 뿐이었다. 도원수 김자점이라는 작자는 더 가관이었다. 개전 초기 황주 근처 토산(兎山)전투에서 패한 뒤 적을 추격한다는 핑계로 청군의 뒷꽁무니만 좇으며 멀찌감치 양근(陽根.양평)까지 후퇴, 조정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원임대신 윤방(尹昉)•김상용(金尙容) 등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세자빈과 원손, 봉림(鳳林)•인평(麟坪)등 두 대군과 함께 몸을 피한 강화도는 더욱 참담했다.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들로 한성판윤(서울시장)이었던 김경징(金慶徵)을 믿고 도검찰사로 임명, 강화도 방어를 맡긴 게 화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능한 김경징이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의 지리적 잇점만을 믿고 방비는 뒷전이고 술타령만 일삼다가 섬 전체를 적에게 헌상하는 불행을 자초했다고 한다. 강화도 백성들이 수없이 도륙됐고 세자빈과 원손, 두 왕자, 윤방 등 많은 조정신료들이 청군의 포로가 됐다. 강화 유수 장신(張绅)은 세자빈과 왕자들도 버려둔 채 잽싸게 배를 몰아 도망쳤으며 이를 꾸짖던 강화 좌부 천총(千摠•정3품) 구원일(具元一)은 분노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척화파의 거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형인 前 좌의정 김상용 등도 불속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인조를 임금으로 밀어올린 반정(反正)공신이란 자들이 나라의 존망이 걸린 국난을 맞아 제 목숨 부지할 궁리나 하며 죽을 자리를 마다하니 전쟁에서 이길 수가 있겠는가.

도원수 김자점과 김경징, 장신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뿐이겠는가. 조정에서 인조를 끼고 돌던 대다수 반정공신이란 자들이 거의 그러했다.

백성은 한심한 임금에게 등을 돌렸고, 무능하고 교활한 신하들은 서로 손가락질하고 반목하며 대립했다. 임금을 구원하라는 조정의 애타는 호소에도 장수들은 오랑캐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은 채 제 살 길만 찾았다. 임진왜란 때 충의(忠義)를 앞세워 사방에서 들고 일어났던 의병과 승병들도 온 데 간 데 없었다. 조선 전역에 개죽음과 망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 전쟁은 이미 시작 전부터 진 싸움이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청군을 쳐부순 장수가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내리꽂힌 한 줄기 빛이었다.

근왕의 명을 받고 서둘러 북상한 김준용은 12월26일 용인(龍仁)과 수원(水原)에 걸쳐 있는 광교산에 진을 쳤다.

그는 산 정상과 그 주변을 선점, 날쌔고 용맹한 병사들을 뽑아 입구(口)자 모양의 진(陣)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 진의 한 가운데엔 군량을 비축, 사생결단할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밤이 되면 횃불을 환히 밝히고 적들을 향해 간간이 포를 쏘아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그 포성은 가깝게 있는 남한산성에도 전해져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임금과 신하들에게도 적잖은 위안이 됐을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초로에 접어든 51세. 온갖 풍상을 겪어낸 노련한 장수였다. 김공은 본래 23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훗날 기존의 무관들에게 시행하는 무과시험인 관무재(觀武才)에서도 장원한 촉망받던 장재(將才)였다. 그 뒤 회령(會寧)•인동(仁同.구미) 도호부사로 있을 때 강직하면서도 인자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함경도 북병사, 영남절도사, 경기우방어사 등 장수의 소임을 맡은 뒤엔 전법 연구와 군사 조련에 힘쓰는 등 군사들을 강병으로 길러내는데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장수로서 함경도에서만 10여 년을 보내 북방 오랑캐들과의 싸움에 능했다.그 때문인지 조선군을 얕잡아보고 거침없이 날뛰던 청나라 기병들도 군기가 엄정한 김공의 부대에는 행군때부터 경계하며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쌍방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격해오는 청나라군에 맞서 아군 정예병들로 반격, 번번이 적의 기세를 꺾었다. 

김준용은 지략이 출중한 장수였다. 적이 유리한 부분을 최소화하고 아군에게 유리한 요소들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싸움판을 이끌었다. 청나라군이 월등한 숫적 우위와  기병 전술에 능한 점에 유의, 지리적 잇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산악전과 과감한 매복•기습공격으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또 활과 총을 잘 쏘는 명사수들로 저격조를 편성, 적의 장수들을 겨누고 우수한 성능의 대포로 적진 중심을 집중타격해 적의 접근을 막았다. 김공은 이와 같은 뛰어난 전술로 연전연승했다. 이에 당황한 적은 몽고군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경중명의 군대까지 동원, 수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쳐왔다. 해발 5백82미터의 광교산 정상에는 새벽부터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불과 3-4천 명의 병력으로 그 몇 배의 막강한 적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김준용 군(軍)애겐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사책(史冊)인 [국조인물고]에는 이 때의 장면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이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곳에 장검을 짚고 서서 죽기를 맹세하자 장병들 모두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해 오랑캐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하루 종일 싸웠다. 적군의 경기병들이 몰래 뒷산 고개를 넘어와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다. 공은 급히 용감한 병사 수백명을 뽑아 앞다퉈 산을 오르게하며 외치기를,  ’지금이 바로 충신이 나라에 보답해야 할 때(此正忠臣報國之秋也)’라고 독려했다. 우리 용사들은 용기백배하여 모두 일당백의 기백으로 육박전을 벌이며 적을 물리쳤다." 

또 오랑캐중에 갑옷을 입고 깃발을 잡고 있던 자가 말을 타고 봉우리 위로 올라가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을 호령하니 군사들이 모두 모였다.

공은 바로 그를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은 물러나지 않는다(彼不殺,賊不退)"고 일갈하며 더욱 힘을 낼 것을 독전했다. 아군의 대포들은 곧바로 그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깃발을 잡고 호령하던 자와 그의 좌우에 있던 여러 오랑캐 장수들이 한꺼번에 포탄을 맞고 즉사했다. 그 옆에 쓰러져 죽은 오랑캐 병사들의 시신 또한 즐비했다.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오랑캐 전사자중 깃발을 잡고 호령하던 적장은 청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였다. 이름과 달리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며 공을 많이 세워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김공의 예상은 적중했다. 대장을 잃은 청군은 "내일 다시 싸우자"며 대군을 수습해 철수했다. 광교산에 진을 치고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지 10여 일 만인 1637년 1월5일이었다.

산아래 이곳저곳에서는 시신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으며 한밤중 산자락을 울린 오랑캐들의 곡성은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공의 부대는 전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승리를 거뒀지만, 더 이상 싸울  여력은 없었다. 주무기인 총탄과 포탄, 화살 등이 바닥났고 군량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김공은 진지 주위에 횃불을 환히 밝혀 군사들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양 위장하고 야음을 틈 타 조용히 광교산을 빠져나왔다.

공주로 도망갔던 전라감사 이시방은 공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공을 모함했다가 무고로 밝혀져 도리어 자신이 귀양가는 망신을 당했다. 그 또한 반정공신이다.

공은 그 뒤 가까이서 임금을 보필하는 어영중군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병석에 있었다. 주변에서 늘 김공을 걱정했지만 공의 가까운 벗인 호판(戶判) 이명(李溟)은 근심 가득한 공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개가 어찌 중국을 공격하는 일을 도울 사람이겠는가. 그의 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某也豈助攻中國者也,其疾固也)"

청나라는 그 때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쓸만한 조선장수들과 군사들을 징발했다. 명장 임경업(林慶業)과 유림(柳琳)도 끌려나갔으니, 김공도 병들지 않않다면 온전했을 리가 없다.

김공은 영남절도사에 제수된 지 1년 뒤인 1642년(인조20년) 진짜 중병으로 절도사직을 그만두고 수레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객관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57세.

공은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죽어서 초라한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장사 치를 여력도 없었다고 한다.

광교산 종루봉 근처 한 바위에는 공의 승전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정조 19년(1794년) 화성(華城)을 쌓을 당시 공사를 관장하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 글을 새기게 한 것으로 돼 있다.

그 바위의 중앙에는 ’충양공김준용장군전승지(忠襄公金俊龍將軍戰勝地)’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과 왼쪽에는  각각 이렇게 썼다.

’병자호란때 공이 호남의 군사들을 이끌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丙子胡亂公提湖南兵勤王) 이곳에 이르러 청나라의 세 대장을 죽였다(至此殺淸三大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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