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636.인조24년)은 우리 역사에서 최대 치욕중의 하나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이 외세에 맞서 싸운 전쟁중에 유일하게 항복을 선언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쳤던 동아시아의 강자 고구려와 중국대륙의 동부 연안지역을 한동안 지배했던 해상강국 백제도 7세기 중엽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맞아 장렬하게 옥쇄했을 망정, 적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고려 또한 13세기 세계를 제패한 몽고에 맞서 30여 년에 걸쳐 6번이나 침략한 몽고군과 처절하고 끈질기게 싸우면서도 항복은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도 백성 및 관군들의 결사항전과 명(明)나라 파병 등에 힙입어 왜적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는 달랐다. 질풍노도 같은 청(淸)나라 대군의 기세와 주도면밀한 전략 앞에 인조와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지친 백성들은 임금에 대한 기대룰 접었다. 장수와 군사들도 진작부터 겁을 먹고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음에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서는 의병이나 승병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미 9년 전인 1627년 후금(後金.청나라전신)이 쳐들어왔던 정묘호란 때 형제의 맹약을 맺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조선 조정엔  여전히 쇄신과 변화, 설욕의 의지가 없었다. 

  박복한 임금 인조와 무능한 조정 신하들이 철석같이 붙잡고 지킨 건 오직 하나, 척화배금(斥和排金)이다. 오랑캐인 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중화(中華) 사대주의가 종교 신앙처럼 자리잡은 조선 조정에서 후금과의 화친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북방의 오랑캐는 날로 강성해져 급기야 대륙마저 집어삼킬 기세이고, 믿었던 명나라는 갈수록 쇠퇴해 망국(亡國)의 낙조(落照)가 짙게 드리웠는데도 이처럼 위기에 둔감할 수가 있었을까. 

  국력과 군사력이 열세면 능수능란한 외교라도 펼쳐 전쟁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 백성과 나라의 안전을 도모했어야  했다. 여기에는 명분과 실리를 다 아우르는 고도의 책략이 필요하다. 이를 도외시한 결과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이 점에서 인조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벌였던 광해군에도 한참 못미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인조의 반정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그랬더라면 조선 백성들이 적어도 정묘.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끔찍한 전화(戰祸)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병자호란은 인조의 무능과 민심 이반, 지리멸렬한 조정과 인재난, 취약한 국방이 빚어낸 참화다. 그 결과는 군사적 참패와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 앞에 나가 상복을 입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것)하며 항복의식을 거행하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병자호란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의 머릿 속을 맴도는 두 가지 회한이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이 대륙경영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스스로 포기해버렸다는 점이다. 

  신흥강자로 부상한 청나라는 군사력은 강했지만, 통치이념과 제도 등 국가인프라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중원 정복을 꿈꿨던 청나라로서는 오랜 왕조국가로서 조선이 갖추고 있는 탄탄한 국가체제와 통치 전반의 축적된 소프트웨어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청나라는 사실 북방오랑캐 시절부터 조선과 서로 대립하면서도 수천년간 교역과 왕래를 계속해온 사이다. 조선의 다양한 문물들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흘러들어갔으며,  조선의 일부 지방수령들은 이들 오랑캐를 크게 교화시키기도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심지어 스스로를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고 칭할 정도였으니, 쌍방간에는 반목과 갈등 속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정서적 동질감 내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오랑캐 입장에서는 작은 조선보다 광대한 중국대륙의 문명과 제도, 인재 등이 훨씬 더 탐났을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진족 등 북쪽 오랑캐들은 한족(漢族)에 대해 원천적으로 종족적 이질감을 느낀다. 여기에 은원관계로 점철된 오랜 역사적 연원 탓에 한족(漢族)들에게 생래적 적대감을 갖고 있다. 북방 오랑캐들에겐 민족적 시원이 같은 조선이 더 가깝고 만만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눈을 크게 뜨고 진취적 자세로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청과 함께 대륙을 공동 통치하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임진왜란에서도 입증됐듯이, 조선은 또 명나라와 일본 등 동아시아 3국 중에서 가장 정교한 대포와 화차(火車), 포탄 등 강력한 화력(火力)을 보유한 나라였다.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으로 불리는 대포와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오늘날의 다연장로켓포를 연상시키는 신기전(神機箭) 등의 위력은 조선이 단연 으뜸이었다. 이를 뒷받침할 무기전문가들도 반상(班常)에 관계없이 끊이지 않고 줄을 이었다. 최무선(崔茂宣), 이장손(李長孫)  , 김지(金墀), 신헌(申櫶) 등등이 그 주요 면면들이다. 이와 같은 조선의 뛰어난 화력과 사수•포수의 출중한 실력은 병자호란 때에도 제 몫을 발휘해 간간이 청나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조선은 굳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칼과 창만을 고집했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그 혹독한 전화(戰禍)를 당하고도 왜 끝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 반드시 되갚아주겠다는 의지도 용기도 배알도 없이 속으로 원한과 울분을 꿀꺽꿀꺽 삼켜버리고 만 것인가. 그 배경에는 난공불락의 중화 사대주의가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다. 사대는 필연적으로 종속을 불러온다. 이것에 손발이 묶여 옴짝달싹도 못한 조선이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엔 사대에 찌든 나머지 으레 굴종과 체념과 포기가 타성이 돼버렸다. 그런데 대륙 공동경영과 군사강국을 꿈꾼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선 고구려와 같은 자주적 기상과 강한 군사력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중화 사대주의는 결국 조선을 말아먹는 결정적 적폐가 된 셈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깝다. 

  해방후 백년도 안돼 지금 다시 중국이 우리에게 강한 추파를 던지고 있다.  중국은 최근 30년 동안 '한국따라하기'로 고도압축성장을 이룩했다. 그 덕분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해져 국제 무대에서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이른바 G2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다. 이렇게 나라 덩치가 커지니까 옛날 좋았던 시절이 그리운 모양이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 유혹의 손길을 뻗치면서 특히 우리에게는 막무가내다. 5백년 동안 조선을 자신들의 발 아래 묶어뒀던 달콤함을 못잊어하는 중국의 마수에 걸려들면, 굴종 정도가 아니라 망국(亡國)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은 이제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과거의 조선이 아니다. 경제.군사적으로 중국을 극복할 충분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협력하고 함께해야 할 동족이지만, 적화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우리의 월등한 국력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에겐 혈맹으로 다져진 든든한 우방인 미국이 있지 않은가. 미국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력하다. 쇠망의 길을 걷던 명나라가 결코 아니다. 중국은 아직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자명하다. 한미간 동맹은 아직 우리에겐 절대 상수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체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권을 담보한다. 이 관계를 흔들림없이 지켜나간다면, 중국이나 북한 문제로 골머리를 썩을 이유도 없다. 중국과의 긴장관계로 인해 초래될 경제적 손실은 서방 동맹체계 안에서 해법을 찾으면 된다. 열사(熱砂)의 땅에서 달러를 일궈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우리 국민의 저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이 사이 우리는 경제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중국.일본.북한도 두려워하는 강대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자. 조선 조정이 뒤늦게라도 이들 무기의 진가를 알아차려 성능 개량과 화력 증강,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명사수와 포수들을 꾸준히 양성하면서 군대편제를 화력 위주로 재편했더라면, 조선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왜적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고, 청나라인들 무서웠겠는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의 와중에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사건 등 서구 열강의 조선 침탈 기도도 애시당초 없었던 얘기가 될 뻔 했다.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안겨준 일본의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이다. 일본과 청나라는 오히려 완전히 꼬랑지를 내리고 우리나라 눈치를 보며 비위맞추기에 급급했을 것이며, 서구 열강들도 동아시아 해역에는 얼씬도 못했을 것이다.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낸 선조들의 무지가 아쉽고 야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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