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해군 소위 한 분이 찾아 왔습니다. 자신을 서경석이라 소개하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근무 중이라면서 소위 월급 한 달 치를 통째로 헌금하였습니다.

그 시절엔 나 혼자 고립무원한 상태로 넝마주이로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던 시절이어서 서경석 소위의 그런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 사상 전설적인 첫 교회였던 황해도 소래교회(松川敎會)를 세운 분의 직계 손자로 기독교로 말하자면 명문 가정의 자녀였습니다.

그는 달마다 한 차례 와서 하룻밤을 자며 교회 일과 나라 일에 대하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의 소개로 젊은이들이 와서 도우게 되었습니다. 주로 새문안교회와 서울대학, 이화여대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일이 고마워 나와 그는 평생 동지로 지나고 있습니다.

하루는 키가 자그마하고 야무지게 생긴 대학 퇴학생이 방문하였습니다. 제정구라 이름을 소개하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니다 반정부 시위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할 일 없이 지난다 하였습니다.

그는 첫 번 대면한 자리에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조국 통일에 저해 요소라 기염을 토했습니다. 나는 그의 반기독교적인 발언을 수긍하면서 일러 주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그런 행적이 있지만 지식인이라면 예수께서 가르친 기독교의 본질과 서구 기독교의 일탈한 모습과는 구별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서구 기독교의 일그러진 모습과 기독교의 본질은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한 기독교가 아니라 민초(民草)의 한(恨)을 가슴 아파하시며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이 아니겠느냐."

내가 그의 말에 반발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면서 열정적으로 내 생각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다른 예수쟁이들하고는 다르네요."하고는 대화가 깊어져 가면서 자기를 받아 주면 이런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기독교도 배우고 빈민들을 돕는 일도 참여하고 싶다기에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어 주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선 넝마주이 팀에 총무로 세우고 곧 이어 시작된 야학(夜學)인 배달학당(Bethel School)의 교감 직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는 야학에서 봉사할 청년들을 많이 데려 왔습니다. 후에 정치가가 된 이해찬은 사회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경기도 지사를 지낸 손학규는 교무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 일꾼들 중에 가장 고맙고 유능하였던 일꾼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이었던 김상현 군이었습니다. 그는 빈민촌의 환자들을 마치 친형제처럼 돌보는 뜨거운 가슴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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