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화성이 완성된 1796년 10월에 거행된 낙성연(落成宴)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해인 1797년 1월 29일 화성을 찾아 성곽을 순시하면서 각 시설물들을 평가하고 동장대(東將臺)에 나아가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한다.
 
“다만 초루(譙樓)나 돈대(墩臺) 등속은 가끔 엉뚱한 모양만 낸 것 같아서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유수(留守)와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이 다투어 논란하던 것으로 결국 도청의 주장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지만 나의 본뜻은 아니다.”(『정조실록』권 46, 1월 29일, 경오)
 
윗글은 화성의 초루와 돈대 등과 같은 시설물이 실용적이지 않고 멋만 부린 것 아닌가 라는 정조의 의중을 나타낸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당시 화성 유수로 있던 감동당상 조심태와 도청 이유경이 화성을 건설하면서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 논쟁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를 통해 화성의 시설물 대부분은 기본설계만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이 하고 시설물의 구체적 모양과 건설은 무관들인 조심태와 이유경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론과 실무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와 ‘다투어 논란’하는 민주적 토론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한 인간사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유경은 1787년(정조 11) 만들어진 군사훈련지침서 『병학지남』(兵學指南)의 범례를 쓴 이론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가? 지나친 실용 만능, 황금만능으로 치달으면서 진정한 철학도, 제대로 된 무(武)도, 민주적 절차도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한번 되돌아본다. 개인이든 국가든 힘(文武)이 없으면 바로 노예로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100여 년전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그의 묘가 있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