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는 21세의 매우 젊은 나이인 1771년(영조47) 정시(廷試) 무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다음해 부사정(副司正)을 제수받았으며 1773년(영조49) 비변사(備邊司)의 무낭청(武郎廳)으로 재직시에는 열심히 근무한 것을 인정받아 왕이 특별히 6품으로 승급시켜 주었다.

또한 1774년(영조50)에는 조선시대의 최고(最高) 군령기관(最高軍令機關)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사(都司)에 임명돼 군의 주요 경력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한편 1775년 불과 26세의 나이로 왕의 시위(侍衛)와 전령(傳令) 등의 주요 업무 등을 담당하는 선전관(宣傳官)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선전관은 일종의 무직(武職) 승지(承旨)의 구실을 하는 무관(武官)으로서 신분이 확실하면서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 중에서 주로 선발했다. 이로 보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후는 정조가 즉위하게 되면서 더욱 중용돼 다양한 관력(官歷)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후의 경력을 살펴보면 정조가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의도적으로 중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후가 군과 관련된 각종 경력을 쌓다가 1790년 이후부터는 특히 수원과 관련된 무반직을 많이 역임하기 때문이다. 이를 연대별로 열거하면 정조가 즉위하는 1776년의 7월에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시작으로 이듬해 훈련도감(訓練都監) 파총(把摠)을, 1779년(정조3)에는 경상남도 진주(晋州)의 영장(營將)을, 1780년(정조4)에는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1785년(정조9)에는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를 지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1790년(정조14) 4월 드디어 경기 지역 군사 요충지중의 하나인 강화(江華)의 중군(中軍)이 됐으며 그해 12월 마침내 수원(水原)의 중군에 제수됐다. 이어서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한 후 1793년에는 경기(京畿) 중군이 돼 경기도 지역의 모든 군사 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됐는데, 화성성역이 시작되기 딱 1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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