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화(文話) 시대] 오디세우스는 무엇을 파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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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가 묻는 영웅의 죄책과 문명의 약속
최승호 문화에디터

[편집자주] 이 글에는 영화 《오디세이》의 주요 장면과 결말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귀환'보다 '귀향'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보니 돌아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됐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략가이고 이타카의 왕이다. 하지만 놀런의 영화에서 그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웅의 위용이 아니다. 오래 전쟁을 겪은 사람의 피로와 죄책감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영화는 그 답을 '제우스의 법'과 트로이 목마 사이에 놓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낯선 이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일은 중요한 관습이었다.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손님은 주인을 해치지 않는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상호 의무를 뜻하는 제니아(xenia)다. 제우스는 이러한 환대의 질서를 지키는 신으로 여겨졌다.

놀런은 이 오래된 관습을 영화 안에서 '제우스의 법'이라는 말로 되살린다.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우스가 바로 그 법을 어긴 사람이라는 점이다.

트로이 목마는 그의 가장 뛰어난 계략이다. 병사들을 목마 안에 숨겨 트로이 성 안으로 들여보냈고, 그것으로 전쟁을 끝냈다. 그런데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이 일을 영광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평화의 선물인 줄 알고 받아들인 목마가 학살의 도구가 됐다. 믿음을 이용해 상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전쟁에서는 승리를 가져온 지략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것을 그렇게만 기억할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가 마음속에서 되풀이해서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상대가 믿고 있는 것까지 이용해도 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단순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전쟁을 수행한 사람이다. 동료를 잃고 긴 세월 고향을 떠돌았지만, 동시에 트로이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놀런은 이 두 얼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워버리지 않는다.

세이렌의 장면이 인상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세이렌은 단순히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잊고 싶었던 것을 다시 들려주는 목소리에 가깝다. 잃어버린 사람들, 지키지 못한 약속, 전쟁 이전의 삶.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이타카라는 땅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자신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떠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활을 다시 드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집을 되찾기 위해 그는 다시 전사의 몸과 기술을 불러낸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이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다시 칼과 활을 들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그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귀향은 단순한 귀가가 아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지금의 세계에서도 낯설지 않다.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에는 저마다의 명분이 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 처음의 명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인간적인 약속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오디세우스가 저지른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와 죽음의 고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목적은 상대의 인간성을 외면할 권리까지 주는 것일까.

놀런이 '제우스의 법'을 끌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 법은 거창한 규칙이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 손님을 해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서로 믿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상식이다.

전쟁은 그런 상식을 가장 먼저 무너뜨린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승리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돌아온다. 페넬로페와 만나고 아들 텔레마코스와 마주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집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 배를 탄다.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영화의 제목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오디세우스에게 귀향은 모든 일이 끝나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온 뒤에도 살아야 한다. 지나온 일을 잊을 수도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그 결과를 안고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바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곁에 있다. 처음에는 고향을 가로막은 길이었고, 마지막에는 다시 나아가야 할 길이 된다.

오디세우스가 파괴한 것은 트로이만이 아니다. 그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이용했던 것은 사람 사이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무너지면 적과 아군의 경계도 달라진다. 누구도 상대의 선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문명의 붕괴는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보다 이런 작은 약속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는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승리한 뒤에도 자신이 한 일을 잊지 못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묻는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것은 전쟁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귀향은 끝났지만, 그가 짊어진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놀런이 마지막에 바다를 다시 보여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영웅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그 삶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승리의 기억보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파괴했는가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최승호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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