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을 달리 부르는 말이 있다.

구멍탄이다.

위 아래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사실 연탄은 애초 구멍이 없었다.

그러다 화력을 키우기 위해 구멍을 뚫게 됐고 구멍 수에 따라 구공탄, 십구공탄, 이십이공탄, 삼십이공탄 등의 각자 고유명이 붙였다.

물론, 지금은 석유와 가스 전기등이 대신하고 있어 ‘잊혀진 난방’으로 전락했지만 연탄은 한때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맘 때를 전후해 집집마다 식구 수에 따라 수백 장씩 미리 쟁여 놓기도 했다.

먼 옛날 얘기 같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서민들 일상의 모습이었다.

 83년 전국 830만 가구 중 연탄을 때는 집은 550만 가구였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연탄은 사실 서민들에게 기쁨만 준 것은 아니다. 슬픔과 고통도 함께 줬다.

겨울을 따뜻이 나게 도와주는 친구였지만 오랫동안 소리 없는 '죽음의 그림자'노릇도 함께 해서였다.

때문에 오랫동안 서민들을 괴롭히는 ‘애물단지’ 노릇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8년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까지 ‘국민연료’로서 인기를 끌며 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듬뿍 받았다.

또 자기를 태워 서민들의 추위를 달래주고 외로움을 떨쳐준다고 해서 칭송(?)도 많이 받았다.

시인 안도현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이런 연탄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있는/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그는 또 ‘연탄 한 장’이라는 시에선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삶이란/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이라며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영혼의 연탄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기도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에너지 빈곤층의 혹독한 겨울나기가 시작 된지 오래다.

덩달아 연탄에 기대어 겨울을 나는 17만여 가구의 홀몸노인 등 형편이 어려운 소외계층 시름도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탄은행에 따르면 올 9~10월 연탄 후원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에 비해 65.7% 감소한 총 12만 장에 그쳤다.

거기에 연탄을 나르는 봉사자도 4분의1로 줄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연탄 후원과 단체봉사활동이 급감한 것이다.

위드 코로나시대 단계적 일상 회복이 거론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연탄 같은 ‘뜨거운 사랑’과 ‘희생’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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