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관 상량식장 전경.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우화관 상량식장 전경.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10월 27일 오전 10시 화성행궁 우화관(于華館) 상량식이 열렸다.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다. 외부에서 온 관리들이 숙소로 이용했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궐패를 모시고 한 달에 두 차례씩 왕이 있는 곳을 향해 배례하는 엄숙한 장소이기도 했다.

1789년(정조13)에 건립될 당시 이름은 팔달관(八達館)이었다. 뒤(1795년)에 우화관으로 개명했다. 우화관의 뜻풀이도 재미있다. 우(于)자는 ‘향해 간다’, 화(華)자는 ‘화성’이라는 뜻. ‘정조대왕의 뜻이 화성을 향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화관은 한양에서 화성유수부로 향해 간 사람들이 머무는 집이니 당시 공무로 간 관리들이 이곳에 묵었다.

우화관은 남향이다. 가운데 대청에 임금의 전패를 모시고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화관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의 본사(本舍)는 세 칸을 모두 대청으로 하여 전패를 모셨고, 좌우의 익사(翼舍)에는 손님들이 묵을 온돌방과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대청을 두었다. 건물 앞에는 삼문(三門)을 세웠다.

우화관 넓은 마당, 즉 과거 신풍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쓰였던 장소에서는 정조19년(1795) 을묘년 원행 때 문과 별시가 열렸다. 이때 수원은 물론이고 광주, 시흥, 과천 등지의 유생들이 과거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감점기에 우화관은 학교로 사용됐고 그나마도 헐리고 신축교사가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헐려나갔던 행궁 건물 대부분이 복원됐는데도 유독 우화관의 복원이 어려웠던 것은 이곳에 역사가 깊은 신풍초등학교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화성행궁보다 역사가 짧다고는 하나 신풍초등학교는 1896년 수원군 공립 소학교로 개교한 경기도 최초의 공립학교였다. 따라서 이날 상량식이 있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화관은 별주 1단계 사업에서 복원하지 못한 시설이다. 화성행궁은 총 576칸 규모인데, 1단계 복원공사에서는 482칸만 복원됐다.

가을이 깊어진 날 상량식장에 앉아 있으니 그간의 세월 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세월, 그 기억들은 꿈만 같다.

1989년 수원의료원(경기도립병원) 신축 계획이 발표됐다.

이 자리는 원래 화성행궁이 있었던 자리인데 도립병원을 신축하면 화성행궁은 복원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당시 수원문화원장이었던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과 수원문화원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심재덕 원장은 행궁자리에 있던 경기도 수원의료원과 수원경찰서, 여성회관, 신풍초등학교를 옮기고 화성행궁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까? 솔직히 말해 나조차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힘없는 우리가 수원경찰서와 경기도립병원, 경기도여성회관, 신풍초등학교를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옛 화성행궁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화성전도’에 있는 화성행궁. 오른쪽이 우화관이다.
‘화성전도’에 있는 화성행궁. 오른쪽이 우화관이다.

심재덕 원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수원의 문화계 인사들과 언론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89년 6월 17일 수원문화원 2층 회의실에서 ‘화성행궁 복원추진 위원회 발기인회’를 개최했다.

위원장 김동휘, 부위원장 홍의선·안익승·심재덕, 추진본부장 이홍구, 기획부장 임병호, 총무부장 송철호, 사료편찬부장 이승언, 섭외부장 김상용, 홍보부장 김우영 등이 선출됐다. 이와 함께 이종학·김동욱·김학두·리제재·송태옥·이상봉·이완선·이호정·조웅호·최홍규 이사(10명), 이근환·정규호 감사(2명) 등 각계를 대표하는 위원 81명이 선정됐다.

당시 심재덕 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병원이나 경찰서를 지을 땅이 다른 곳에 얼마든지 있는데, 행궁터에 공공기관을 세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제가 문화 말살정책의 하나로 계획적으로 행궁을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이 끝난 지 46년이 지나도록 행궁을 되살리지 못한 것은 문화국민의 수치로 하루빨리 행궁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이 과정은 본보 ‘김충영의 수원현미경’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1989년 6월 초 심재덕 원장과 김동휘 선생, 이종학 서지학자, 안익승 경기도 유네스코회장, 이승언 향토사학자 등과 함께 사전 약속도 없이 경기도지사실을 방문했다. 도지사 비서실은 수원 유지들이 오자 약속이 된 줄 알고 도지사실로 안내했다. 당시 임사빈 도지사는 점심식사 후 휴식 중이라서 당황했다고 한다. 심재덕 문화원장과 일행은 임사빈 도지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한 책동으로 파괴된 화성행궁터에 수원의료원을 증축하면 영원히 화성행궁을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수원의료원 증축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임사빈 도지사는 심재덕의 이야기를 듣고 수원의료원 증축담당 국장을 불러 경위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 계획을 유보시켰다. 수원의료원을 연초제조창 옆으로 이전토록 지시했다.』

나는 화성행궁 복원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특히 고인이 되신 심재덕·안익승·김동휘·이승언·이종학 선생의 공적은 지워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당시 임사빈 경기도지사의 이름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임사빈 지사의 판단은 현명했다. 그의 결단이 없었으면 화성행궁 복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0년 12월 22일 화성행궁에 있던 수원의료원이 이전됐다. 1993년 8월 10일에는 화성행궁 복원이 수원시정의 중점시책으로 선정돼 행궁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이 수립됐다.

1996년 5월 3일 경기도로부터 설계심의를 받았고 그해 7월 18일 화성행궁 복원 기공식이 거행됐다. 화성행궁 1단계 복원사업은 2003년 완료됐고 그해 10월 9일 화성행궁 개관식이 열렸다.

그러나 행궁복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그 사람, 심재덕 전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989년 시작된 수원 화성행궁 ‘복원 대장정’은 머지않아 마무리된다. 우화관과 별주만 마무리되면 완전체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우리 앞에 선다.

상량식에 참석한 (사)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상량식에 참석한 (사)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이날 상량식을 보면서 다시 가슴이 설렜다. 머지않아 우화관과 별주까지 보게 될 것이란 기대감에.

낮에는 입에 술을 대지 않는 나이지만 오랜만에 화성연구회 회원들과 낮술도 한잔 했다.

내킨 김에 이아(貳衙)와 중영 등도 복원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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