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의 「충신(忠臣)」조에는 총 3명이 등재돼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이름난 인물이 한명윤(韓明胤 1542∼1593)이다. 한명윤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회숙(晦叔)으로 청양군(淸陽君) 한치의(韓致義)의 5세손이자 부호군(副護軍)를 지낸 한이(韓頤)의 아들이다. 수원부 남쪽 쟁홀면(爭忽面, 지금의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서 태어났다.

1568년(선조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을 제수받은 뒤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1590년(선조23)에는 충청도 영동(永同)의 현감(縣監)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동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크게 활약하는 공을 세워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경상도 상주목사(尙州牧使)에 특배돼 방어사(防禦使)를 겸했는데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전사했으니 향년 52세였다. 사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봉해지고 이조참판에 됐다. 또한 한명윤의 부인 밀양박씨도 열녀로 이름이 높다. 임진왜란 당시 남편 한명윤이 피신할 것을 요구했으나 남편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이 쳐들어오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같은 사실이 『삼강행실』에 전해온다. 화성시 양강면 정문리 198-3번지에는 한명윤의 충신 정려문과 밀양박씨의 열녀 정려문 현판(懸板)이 함께 안치된 2칸짜리 한옥 건물이 있는데 그 처마 밑에는‘충렬문(忠烈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86년 화성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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