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5월 31일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1945년 5월 지금의 태평로 서울시의회 자리였던 부민관에 폭탄을 투척했던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소장과 전 반민특위 조사관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반민특위 활동이 친일세력에 의해 좌절된 이후 무려 58년 만에 제2의 반민특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는 자리였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위원회는 앞으로 4년간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에 들어간다. 60년 전의 역사 속 진실을 캐는 작업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진실 규명에 투입될 인원도 민간조사요원 58명, 공무원 55명에 이른다.

#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김웅진 의원 등이 제출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반민특위의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다음 날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위원장에 김웅진, 부위원장에 김상돈이 선출됐다. 이어서 8월 17일에는 김웅진 의원 등이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제출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안 기초자가 김웅진 의원임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김웅진 의원은 수원 출신이었다.

헌정회 자료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사료에 따르면, 김웅진은 1905년 10월 11일 수원에서 출생했다. 중동중학교와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안녕수리조합 기사와 안악금농장기 사장, 합명회사 금농장기 전무이사 등을 역임하고 1948년 수원 을 지역에 출마, 제헌국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당시 수원에는 두 명의 제헌국회 의원이 선출된다. 김웅진과 홍길선(1904-1980년)이었다. 홍길선은 동아일보 수원지국장 출신이다. 김웅진이 한국전쟁 때 납북돼 행방을 알 수 없는 반면 홍길선은 2대, 4대, 5대 국회의원까지 역임한다.

김웅진에 대한 기록은 1926년 7월 수원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공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水警高秘 제465호 수원고농교 분규사건(학생집회개최)에 관한 건'의 제목으로 되어 있는 공문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 맹휴사건에 참가자로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수원고등농림 맹휴사건은 1926년 6월 17-18일에 고등농림학교 재학생들이 학교 측에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줄 것, 교사 신축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한 사건이다. 동아일보는 1926년 6월 28일자에 '수원고농교 전교생 정학, 학생의 동맹휴학에 학교당국의 고압'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친절할 것과 교사 신축을 요구했지만 실상은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었다. 김웅진은 바로 이러한 저항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이후 안녕수리조합 기사와 안악금농자기 사장 등을 지냈던 그는 해방 이후 군정청 농무부기사를 지내기도 한다.

송건호 등이 쓴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김웅진에 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반민특위에 관한 내용이다.

결국 이날 본회의는 이미 제정 공포된 헌법 제101조의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에 의거 '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김웅진 의원의 동의를 가결하였다.

국회는 또 동 기초위원회는 28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할 것도 아울러 결의, 서울과 각 도 출신 의원 중 3명씩(제주도는 1명)을 추천받아 기초특별위원회(위원장 김웅진, 부위원장 김상돈)를 구성, 법안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기초위원 28명은 다음과 같다.(강만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수원 출신이 해방 이후 역사적 과제인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58년 전 굴절된 우리 민족사를 다시 쓰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좌절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는 한국 전쟁 당시 납북돼 행방을 알 수 없다.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리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가운데 수원 시민의 가슴 속에서 한 '잊혀졌던 정치인'이 부활하고 있다.

<여의도통신=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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