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환 여의도통신 대표기자
한국전쟁 55주년, 서해교전 3주년, 김선일 피살사건 1주년 그리고 김동민 일병 총기난사사건….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전쟁과 평화에 대한 단상'을 적으려는 필연성은 충분하거니와, 그 첫 순서로 필자의 애독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경북 김천 봉산에서 유기농법으로 포도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김성순 선생. 필자가 쓴 거의 모든 기사와 칼럼을 그가 모니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선생은 아주 간혹 전화나 편지로 짧은 독후감(?)을 전해오는 경우도 있는데, 항상 누군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의 의미와 그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아마도 여의도통신 모니터 대상 의원들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대구사범 15기 출신인 김 선생은 1949년 8월의 어느 날 동료 교사 6명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의 단정반대와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전단을 뿌리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젊은 교사의 소박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일을 벌였던 그들에게 적용된 것은 그러나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의 굴레였다. 1심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대구형무소 미결감에서 6.25를 맞았고, 그것이 그의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선생은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 늦은 밤에 제주도·목포·보성·안동 출신 시국 관련 수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서 끌려나가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른바 대구형무소 학살사건의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분단 조국은 1952년 4월 간신히 목숨 하나만 건진 채 출감한 선생을 가만 두지 않았다. 젊은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군기술하사관에 지원했지만 특무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불명예 제대를 당해야 했고,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군 제3보충대에 징집된 것이다. 7년 동안 감당해야 했던 힘겨운 군대 생활을 그나마 지탱시켜 준 것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이었다.

"이리하여 어디까지나 깊이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리하여 어디까지나 높이 높이 오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선생은 강릉, 포항, 제주, 인제, 양주, 동두천 등의 낯선 땅 차가운 막사를 전전하며 짜라투스트라가 외쳤다는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게 버텼던 군대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삼십 줄의 노총각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늦은 장가를 들어 인생의 반려자로 만난 청송 두메산골 처녀와 함께 하천부지를 개간해 포도를 심는 일이었다.

똥장군을 끌면서도 행복했던 포도농사 10년으로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후에야 선생은 유달영 선생이 지도하던 마을금고 재건학교 운동에 동참했고, 유신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던 1970년대에는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같은 인생을 온몸으로 살아온 김성순. 몇 년 전 선생이 한국 현대사 발굴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생면 부지의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나카쓰라 아키라(中塚明)라는 일본의 노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계속).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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