뎡리의궤 행궁전도.(자료=수원시)
뎡리의궤 행궁전도.(자료=수원시)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로 건립됐다. 정조는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수원에 와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화성행궁 후원은 일제 강점기 화성행궁 철거와 함께 훼손됐다. 화성행궁 복원사업 이전의 사진을 살펴보면 후원부분에 여러 동의 건물이 보인다. 건축으로 인해 지형과 수목이 훼손됐다.

행궁과 후원 복원전모습. 경찰서, 여성회관, 도립병원, 신풍초교건물, 후원부분 집, (사진=수원시)
행궁과 후원 복원전 모습. 경찰서, 여성회관, 도립병원, 신풍초교건물, 후원부분 집, (사진=수원시)
화성행궁 복원전 후원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행궁 복원전 후원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조선 궁궐 건축 양식은 후원을 조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조선 5대궁궐에도 후원이 조성됐다. 대표적인 곳이 창덕궁 비원이다. 화성행궁 역시 화성성역의궤에 첨부된 화성전도와 행궁도에 후원이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후원에는 내포사(內鋪舍)와 미로한정(未老閒亭)이 있었다.

화성전도(화성성역의궤), (사진=수원시)
화성전도(화성성역의궤), (자료=수원시)

내포사는 성곽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임금에게 연락하는 초소이다. 그리고 미로한정은 정조가 장래 늙어서 한가롭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화성관련 그림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림 중 ‘한정품국도(閒亭品菊圖)’가 있는데  한가로이 국화를 감상하면서 쉬겠다는 그림이다. 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조의 화성행궁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한정품국도. (자료=서울대박물관 소장)
한정품국도. (자료=서울대박물관 소장)

화성행궁 복원사업이 추진되던 2000년 당시 문화관광과 학예사로 근무하던 이달호박사가 미로한정터를 찾으러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당시 함께 한 사람은 이달호 박사, 김우영 늘푸른수원 편집주간, 이용창 시청 사진담당, 강주수 화성연구회 이사와 나였다. 훼손된 행궁 뒤 산속을 찾아 헤매다 이달호 박사가 “여기 주초석이 있다”고 소리쳤다. 주초석은 흙에 묻히고 수풀에 가려져 있었다. 화성행궁 후원에 미로한정이 있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미로한정 주초석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미로한정 주초석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복원된 미로한정.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복원된 미로한정.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행궁복원과정에서 미로한정이 복원됐다. 이후 화성행궁 1단계 복원 사업이 2002년에 마무리됐다. 준공행사는 2003년 화성사업소가 설립된 그해 10월 9일 화성문화제에 앞서서 열렸다. 후원 공사는 화성행궁 복원사업이 마무리된 후 진행됐다. 후원 터는 산비탈에 집을 짓느라 산을 깎고 옹벽을 설치하고 도로를 포장해서 지형이 완전히 훼손된 상태였다.

건물 잔재를 정리하는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건물 잔재를 정리하는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훼손된 지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시설물의 철거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고민거리가 남아 있었다. 후원 왼편에 영산 약수터가 있었다. 행궁후원 조성 공사 때까지 약수터로 활용 되던 곳이다. 하지만 민원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영산약수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영산약수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새로이 조성한 약수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새로이 조성한 약수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영산약수터는 이름대로 영험했는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전국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치성 드리는 물품과 잔재들이 널려있어 불결한 환경이었다. 그리고 약수터 앞에 치성을 드릴 때 복채를 넣는 복전함이 놓여있었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1주일에 몇 십만원씩 수거해 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영산약수터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정지작업을 했다. 대신에 그 위치에 새로이 약수터를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화성행궁 후원은 궁궐의 모습이 원형으로 남아있는 창덕궁의 예를 따르기로 했다. 행궁 바로 뒷면에는 화계(花階)를 설치하기로 했다.

복원된 후원 화계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복원된 후원 화계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후원의 지형은 경사가 심했다. 이 때문에 경사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계단을 설치해야만 했다. 화계에는 정조대왕이 좋아했던 석류, 매화, 진달래, 감국, 자두를 심었다. 그리고 후원 경사면에는 소나무를 심기로 했다.

소나무는 수원에 있는 나무를 옮겨 심으면 제일 좋았으나 수원에서 많은 나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전국에 수소문을 했다. 나도 직접 몇 군데 가보았는데 적합한 곳이 없었다. 하루는 직원들이 강원도 양양에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가 보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나무가 거기 있었다.

나무의 크기와 수형이 좋아서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후원에 강원도 양양의 소나무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 강원도 양양에 큰 산불이 나서 소나무가 모두 참화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화성행궁에 옮겨온 소나무는 참으로 운이 좋은 소나무들이었다.

후원에 소나무를 식재하는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후원에 식재한 소나무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후원조성 사업은 행궁 내 조경사업을 포함돼서 발주했다. 그런데 행궁 안에 심을 나무를 찾지 못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산이 부족해서 알맞은 나무를 고르지 못한 것이다. 행궁 마당에 소나무 4그루를 심는 계획이었다. 이 소나무를 시장에서 사려면 한그루에 수백만원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행궁안 마당의 소나무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행궁안 마당의 소나무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영덕리에 있는 이영미술관 정원에 좋은 나무를 본 기억이 난 것이다. 그래서 김이환 관장께 전화를 드렸다. "사실 행궁마당에 좋은 소나무를 심어야하는데 나무를 찾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망설임 없이 나무를 주겠다고 하셨다. "와서 보고 골라 가라"고까지 말씀 하셨다.

“내가 화성연구회 이사장인데 화성행궁에 심겠다는데 기꺼이 협조해야지” 하셨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리니 예산만큼만 주면 된다고 하셔서 아주 헐값에 가져왔다. 이후 행궁광장을 만들 때도 행궁 쪽 명당수 앞에 소나무 13주를 더 주셨다.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와 김이환 관장님과는 인연이 깊다. 1982년 당시 도시계획계에 근무할 때이다. 김 관장께서는 용인군 영덕리 신갈골프장(현 태광골프장) 사장으로 부임해 골프장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고 계셨다. 그런데 신갈 골프장의 절반이 수원도시계획구역에 포함돼 수원시에서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때 업무를 담당했던 인연으로 후일 골프장이 완공됐을 때 나에게 감사패를 주셨다. 세월이 지나 화성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자 김이환 관장께서도 화성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셨다. 이런 인연으로 다시 뵙게 돼 화성연구회 이사장으로 모시면서 현재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일화는 행궁후원 공사가 완공되고 다음해인 2006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 해 여름에는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성토한 부분에 빗물이 많이 스며들어 경사면이 약해지면서 후원의 흙더미가 행궁건물 지붕아래까지 덮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은 화성연구회에서 일본에 답사를 가는 날이었는데 나는 답사를 취소하고 복구 작업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성행궁은 후원을 포함해 1단계 복원사업이 완료된 지 10여년이 지났다. 이제는 후원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아주 쾌적한 풍광을 이뤘다. 특히 봄과 가을이 되면 미로한정 주변에 감국이 일품이다. 사색하기 좋은 후원이 됐다.

행궁후원 산책로. (사진=김충영 필자)
행궁후원 산책로.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행궁과 후원의 최근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화성행궁과 후원의 최근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수원시에서는 미복원된 우화관과 별주, 분봉상시 등을 오는 2025년까지 완성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온전한 화성행궁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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