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순대 앞에서 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 동남각루와 억새군락지. (사진=김우영 필자)
안성순대 앞에서 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 동남각루와 억새군락지. (사진=김우영 필자)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김우영 시인님이세요? 여기 안성순대예요.” 안성순대 안사장님이다.

안성순대는 지동시장 지나 마을 입구에 있는 내 오랜 단골집이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지? 내가 시를 쓴다는 건 또 어떻게 아셨대.

허긴 내 주변 사람들도 자주 가는 집이니까 내 신상을 알 수 있겠구나.

“4월 4일 문 닫아요”

아, 지난번 들은 적이 있었다. 건물 주인이 이곳에 편의점을 내기로 해 가게를 비워줘야 한다는 얘기를.

그래도 이렇게 빨리 문을 닫을 줄은 몰랐다. 지난번 ㅇ형과 갔을 때 “머지않아 문을 닫으니 자주 오셔유”라고 말하는 안주인에게 다른데서 하시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젠 그만 쉴래요”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하긴 두 내외 나이도 70이 훨씬 넘었으니 쉬실 때도 되긴 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참 많이 아쉽다. 앞으로 어디 가서 이렇게 값싸고 푸짐하며 정까지 듬뿍 곁들인 순댓국이나 소머리국밥에다 막걸리를 먹을 수 있을까.

곧 문을 닫는 안성순대. (사진=김우영 필자)
곧 문을 닫는 안성순대. (사진=김우영 필자)

이 집 주인 부부는 40년 가까이 음식값을 올리지 않았다. 순댓국 한 그릇에 4000원, 소머리국밥은 6000원이다.

머리고기 수육 5000원, 돼지껍데기무침 5000원, 닭갈비 채소볶음(2인분) 1만원, 오징어순대볶음(2인분) 1만원, 주인 부부가 직접 낚시로 잡아온 망둥어조림 1만원 등이다.

너무 싼 음식 값에 단골들이 값을 올리라고 걱정할 정도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이 고맙기 때문이란다.

안성순대에 갈 때마다 내 집처럼 편안했다. 10살 차이가 넘게 나는 바깥주인에게도 스스럼없이 형님이라고 불렀다. 나 같은 서민을 위해 오래도록 건강하게 장사를 계속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집과의 인연은 40년이 넘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부터 드나들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야 이집에 외상값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도 기억력 좋은 안주인께서 알려줬기 때문이다.

군대 가기 전 술을 진탕 먹고 그냥 가더란다. 그리고 휴가 때 들렀다는데 외상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더란다. 군인이 무슨 돈이 있겠나 싶어 얘기를 안했다가 몇 년 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오길래 취직했구나 싶어서 말을 했고 외상값을 받았다고 한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과 먹고사느라 그 사실도 잊고 살았다. 한동안의 세월이 흐른 뒤 안성순대는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몇 년 전 무심코 들러 순댓국에 막걸리를 한잔 하는데 안주인이 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다시 단골이 됐다.

내외는 내가 가면 당신들이 먹으려고 해 놓았던 반찬이나 안주를 다른 사람 모르게 슬쩍 내 식탁에 가져다 놓는다. 친 막내동생이 와도 이렇게 반가워할까.

한동안 뜸하면 어디 아팠냐고 걱정해주는 주인 내외를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

안성순대 내부 주방과 안주인. (사진=김우영 필자)
안성순대 내부 주방과 안주인. (사진=김우영 필자)

이렇게 안성순대는 내 추억의 한 페이지에 기록됐다. 항상 주머니가 비어 있던 20대 초반부터 60중반에 들어선 지금까지 항상 반갑게 맞아주던 그 환한 얼굴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노을이 아름다운 날, 이 집 앞에서 술친구들과 취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하던 억새꽃과 어우러진 화성의 정취도 자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 20대, 푸르디푸른 젊은 날의 추억도 이젠 그만 잊혀지겠지.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