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민각 모습. (사진=필자 김충영)
여민각 모습. (사진=필자 김충영)

수원 종로사거리의 여민각(與民閣) 종각 중건(重建)사업은 윤한흠 선생의 종로 그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윤한흠 선생의 그림이 수원시 관계자들과 김용서 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문화재위원 등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각 건립이 구체화되어 갔다. 장소는 옛 지적도에 표기된 동남쪽 모퉁이에 종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규모 등을 고려할 때 그곳에 지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동남쪽의 건물 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종각부지 모습. (사진=필자 김충영)
종각부지 모습. (사진=필자 김충영)

종은 팔달산에 있는 '효원의 종'을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김용서 시장은 효원의 종은 그곳에 그대로 둬 체험용으로 하고 의전용으로 새로 만들자고 했다. 

세상 일은 두 가지가 다 좋은 경우는 없다. 이 경우도 그렇다. 효원의 종을 내려왔을 때 장점은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동안 체험용으로 개방한 타종체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각복원사업은 정확히 표현하면 종각을 새로이 짓는 일이므로 종각 중건(重建)사업이다. 종각중건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토지 및 건물을 보상하는 일과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받는 일이 첫 번째였다. 종각부지는 1013㎡(306평)으로 결정됐다. 토지주가 보상금이 적다는 이유로 협의 매수에 불응해 토지수용재결을 받아야 했다. 

종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70㎡(21.2평) 2익공 사모지붕 겹처마 양식이 채택됐다. 윤한흠 선생이 그린 그림이 맞는다고 해도 당초 위치인 도로에 종각을 지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규모 또한 시대적인 여건을 감안하면 1칸짜리 종각을 건립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서울 보신각의 경우 너무 체모를 중시한 나머지 종각을 2층으로 세웠다. 종각은 종을 걸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서울 보신각. (사진=필자 김충영)
서울 보신각. (사진=필자 김충영)

첫째가 종소리가 잘 나도록 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보신각종은 2층으로 짓다보니 종 하단에 울림통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종소리의 울림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수원의 종각은 단층으로 하면서 체모를 높이는 방법을 찾았다. 2단을 조성해 종각을 높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건축양식 또한 건물의 체모를 살리기 위해 외1출목 2익공 사모지붕 양식을 채택했다. 건축물은 바닥면적 70.6㎡(21평), 처마높이 5.5m, 건물높이 13.3m로 설계됐다.

여민각 공사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여민각 공사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건축설계는 (주)삼풍엔지니어링이 참여했으며 시공은 금세기종합건설(주)에서 맡았다.

종각의 주인공은 종이다. 좋은 종이 만들어져야 종각이 빛나는 것이다. 종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이며 성종사 대표인 원광식 주철장이 맡았다. 

종의 바깥지름은 약 2.2m, 종의 어깨높이 2.8m, 종 하대두께 0.2m, 종 몸체높이 3.02m, 종 무게 21.5톤(5733관)으로 설계됐다. 종의 형태는 1790년에 제작된 용주사 범종의 모양을 모델로 했다. 종의 네 방향에 새기는 명문은 인인화락(人人和樂), 호호부실(戶戶富實), 수원위본(水原爲本), 세방창화(世邦昌華)로 결정했다. 뜻은 “수원시민 모두가 화합하여 즐거워하고, 수원의 모든 가정마다 부유하여 충만하니, 수원시를 근본으로 하여, 세계화로 지방이 창성하고 번화하게 되리라” 란 의미이다. 

인인화락 명문 글. (사진=필자 김충영)
인인화락 명문 글. 글은 양택동선생이 썼다. (사진=필자 김충영)

‘호호부실 인인화락’은 정조대왕이 1795년 화성행차 시 하신말씀이다. ‘수원위본 세방창화’는 당시 김준혁 학예사(현 한신대교수)가 제안하여 채택된 문구이다. 종각공사는 건물 철거가 완료되는 2008년 6월에 시작됐다. 

이어 종각 명칭공모에 들어갔다. 종각의 이름을 시민 공모로 하였는데 많은 명칭이 제안됐다. 최종에는 '더불어 사는 행복한 도시'의 의미인 여민각(與民閣)이 선정됐다. 이 또한 김준혁 교수의 제안이었다. 김교수는 상량문도 썼다.

여민각 고유제를 집전, 분향하는 당시 김충영 화성사업소장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여민각 고유제를 집전, 분향하는 당시 김충영 화성사업소장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종각 중건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는 2008년 6월 12일 국가의 중대한 역사(役事)가 있을 때 올리는 전통의례로 거행했다. 화성사업소장이었던 필자가 제관이 돼 분향했다. 

상량식(上梁式)은 2008년 8월 21일 거행됐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김용서 수원시장이 헌주가 돼 수원종각중건상량기원문(水原鐘閣重建上樑祈願文)을 올리는 행사에 지역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과 시공사 대표 등 많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고 정성스럽게 진행됐다.

김문수도지사와 김용서 수원시장이 여민각 상량문을 올리고 있다.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김문수도지사와 김용서 수원시장이 여민각 상량문을 올리고 있다.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준공행사는 2008년 10월 8일 화성문화제 전야제 행사로 치러졌다. 이날 행사에는 경기도 관계관, 수원시 관계자,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시공사 대표, 자매도시 관계자와 일반시민 수천 명이 참여했다. 여민각 이름대로 참으로 더불어 사는 행복한 도시의 시민들답게 행복한 모습이 역력했다.

여민각 준공행사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여민각 준공행사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연말에는 종각중건공사에 참여한 분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작은 자리를 준비했다. 20명이 참석해서 타종식도 가졌다. 초청자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여민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소회를 한 장씩 써오는 조건이었다. 위로연에서 각자 소회를 낭독하는 시간도 가졌다. 건축설계를 담당했던 김관수 현재 여유당건축사사무소장은 “종각의 자료가 없고 지적도에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설계가 어려웠다. 추정복원이 아닌 현시점에서 전통적 종각을 만드는 개념으로 설계에 임했다”고 했다. 

여민각 중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화성사업소)
여민각 중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남기완 복원정비과장, 김관수 설계자, 김충영 화성사업소장, 원광식 주철장(종제작), 김순기 소목장, 최영구 금세기건설대표, 둘째 줄 왼쪽부터 박성근 전기감독, 노인덕 전기소장, 이규남 각자장, 이낙천 현장소장, 이윤숙 대안공간눈대표, 조길완 석공, 세째줄 왼쪽부터 오수강(영상촬영), 김재성(전기), 김선옥 현장감독, 넷째줄 왼쪽부터 임재철(화공), 이인기(화공), 심태보(토목설계), 박표화 시설계획팀장. (사진=화성사업소)

건축공사를 담당했던 금세기종합건설(주) 이낙천 현장소장은 “좋은 자재를 고르기 위해서 전국의 산지를 찾아다니며 좋은 육송을 구했을 때 감회가 생각난다. 역사에 남을 종각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여민각 현판글은 근당 양택동 선생이 썼다. 현판 판각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각자장 이규남 선생이 맡았는데 “영원히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간직될 수 있도록 정신의 도(到)로 한 점 한 획에 열과 성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여민각 중건공사 준공비는 조각가인 이윤숙 대안공간 눈 대표가 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민각의 중건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로 방이 펼쳐지는 형태를 입체감 나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종설계자 나형용교수, 종제작자 성종사 대표, 주철장 원광식의 종제작후 시험타종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종설계자 나형용교수와 종제작자이며 성종사 대표인 원광식 주철장이 종 제작후 시험타종을 하고 있다. (사진=화성사업소)

“여민각종이 완성돼 장중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무언가 해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가슴이 뭉클했다. 여민각종이 대한민국 근대 범종사에 길이 남을 걸작임을 자부한다”

종 제작을 맡았던 장인 중요무형문화재 원광식 주철장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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