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옛지도 표지사진. (사진=필자 김충영)
수원의 옛지도 표지사진. (사진=필자 김충영)

밀레니엄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던 1999년의 이야기이다.

앞선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1998년 도시계획과장으로 복귀해 화성업무를 도시계획과 업무로 받아들이게 됐다. 화성과의 만남 이후 화성연구회 활동은 나의 마인드가 많은 분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도시계획과의 당면과제는 새 천년기를 맞는 수원시의 도시계획을 새로이 세우는 일이었다. 도시계획은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행정으로써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지난 일을 살피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향후 20년을 예측한 장기 마스터플랜(도시기본계획 수립)을 세우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장기 마스터플랜 내용 중에서 전반기 10년에 해당하는 내용을 도시계획에 반영하는 계획(도시계획 재정비)을 수립하는 일이다. 또 세 번째는 도시계획이 결정된 사항을 지적선이 들어간 지형도면에 확정해 넣는 작업이다.

일련의 작업이 끝나려면 3~4년이 걸리게 된다. 그런데 필요한 예산이 일괄로 5억원이나 확보된 것이다. 그러니까 첫 해는 장기마스터플랜(도시기본계획)만 발주하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좀 연기해도 되는 것이어서 나는 엉뚱한 발상을 했다. 내년 후년에 해도 되는 예산으로 수원의 뿌리 찾기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2000년대를 준비하는 도시계획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가진 수원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이같은 생각을 직원들에게 이야기하니 그렇게 해보자고 반응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당시 이종구 도시계획국장과 상의했다. 그리 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수원의 뿌리 찾기 사업이 시작됐다.

‘수원지방지도’ 지나조선 고지도에 수록 1623년 23.5×31.0cm, ‘수원 한남(漢南) 수성(隨城) 매홀(買忽) 수성(水城) 수주(水州)’로 이어진 고을명칭 변천과정이 기록돼 있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수원지방지도’ 지나조선 고지도에 수록 1623년 23.5×31.0cm, ‘수원 한남(漢南) 수성(隨城) 매홀(買忽) 수성(水城) 수주(水州)’로 이어진 고을명칭 변천과정이 기록돼 있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첫 번째 과제는 역사 이래 수원 변천과정을 알기 위해서 수원의 옛 지도를 모두 찾아내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수원시 도시계획 변천사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옛 지도 분야는 역사분야이므로 당시 수원시의 1호 학예사인 이달호 박사와 상의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옛 지도 분야에서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받은 국사편찬위원회 고중세사실장 이상태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이상태 박사를 찾아갔다. 수원의 옛 지도책을 만들고자 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다고 했다. 당시 이상태 박사는 학위를 받은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이 박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협조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 지도 분야 재야 사학자인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이사 이우형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이우형 선생은 평생 지도에 관한 일을 했다고 한다. 주로 학생용 지리부도 만드는 일을 했다면서 대동여지도에 매료돼 현존하는 대동여지도 20여종을 모두 확인하고 연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의 흔적을 찾는 기념사업회 일을 한다고 했다. 그동안 김정호 선생의 기록이 없어 잘못 알려진 진실을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동여지도 전도. 1860년경 64×114.3cm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 전도. 1860년경 64×114.3cm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동안 막연하게 수원의 옛지도 책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이제 서광이 보이는 듯 했다. 그래서 며칠 후 이달호 박사, 이상태 박사, 이우형 선생과 함께 만남을 가졌다. 나는 이 자리에서 세 분이 수원 옛 지도책 출판 편집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수원의 옛 지도책에는 첫째로 수원을 중심에 두자고 했다. 두 번째는 수원과 인접하고 있는 고을의 지도를 수록하자고 했다. 인접 고을과 분할 합병 절차를 거듭하며 행정구역이 변천해왔기 때문에 반드시 다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광역적인 지도를 포함하기로 했다. 경기도 전도와 조선전도, 세계지도를 포함하기로 했다.

광주지도. 1760년 37.8×49.8cm. (사진=서울대학교규장각 소장)
광주지도. 1760년 37.8×49.8cm. 팔도군현 지도책에 수록된 지도, 왼쪽하단에 남양계 수원계 용인계 송동면 일용면 미륵당 광교산이 표기돼 있다. 1789년7월15일 정조는 영우원(사도세자묘) 천장을 위해 수원 읍소재지를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광주의 일용면과 송동면을 수원에 붙이게 했다. (사진=서울대학교규장각 소장)
수원부지도, 1872년제작, 97.5×117.5cm, 조선후기 지방지도에 수록된 지도이다. 북쪽에 광주계 안산계가 표기돼 있다. 광교산과 일용면 송동면이 수원지도에 표기돼 있어 1789년 7월15일 정조의 지시에 의해서 수원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규장각소장)
수원부지도, 1872년제작, 97.5×117.5cm, 조선후기 지방지도에 수록된 지도이다. 북쪽에 광주계 안산계가 표기돼 있다. 광교산과 일용면 송동면이 수원지도에 표기돼 있어 1789년 7월15일 정조의 지시에 의해서 수원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규장각소장)

수원의 옛 지도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원에 관한 옛 지도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역사자료와 옛 지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을 찾아 김문식 학예사(현 단국대교수)와 상담을 했다. 당시 함께 간 사람은 지준만 박사(현 영통구 종합민원과장), 최호운 박사(현 화성연구회이사장)다. 

당시만 해도 옛 지도 발간은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서울의 옛지도 책을 발간한 것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수원시에서 옛 지도책을 발간한다고 하니 반갑게 대해주었다. 김문식 박사는 이런 인연으로 수원과는 깊은 인연을 맺고 정조시대를 연구하고 자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원의 옛 지도 책에는 여러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지도를 수록하고자 했다. 각 기관에 공문을 보내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다음은 지도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사가 직접 기관에 찾아가 촬영을 해야만 했다. 그 많은 지도 중 70%이상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미 김문식 박사가 협조를 약속했기에 행정절차를 밟기 위해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장 앞으로 협조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김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관장이 협조해주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정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 18×25cm,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소장)
영화정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 18×25cm,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소장)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수원시가 화성을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것은 잘 한 것인데 지금 하는 모습은 화성을 망치는 일을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수원시는 만석거에 공원조성을 위해서 저수지 주변을 매립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수지 아래의 대유둔을 메워 택지개발사업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규장각 관장은 정조의 유적은 파괴하면서 옛 지도 책은 만들면 무엇 하냐고 했다는 것이다. 

만석공원 모습, 영화정도 위치에서 찍었다. (사진=필자 김충영)
만석공원 모습, 영화정도 위치에서 찍었다. (사진=필자 김충영)

그래서 우선은 규장각 이외의 기관에서 소장하는 지도를 촬영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외의 기관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양산 대성암,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수원선경도서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수원시 공직자 류병주 부친 류철현, 정신문화연구원, 호암미술관,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소장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면서 김문식 박사와 연락을 하곤 했다. 이렇게 하늘만 쳐다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어떻게 하면 관장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며칠을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찾은 여러 자료들을 한 부씩 준비해 규장각을 찾아갔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관장의 노여움이 많이 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옛 지도를 며칠에 걸쳐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수원의 옛 지도에는 수원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과천현, 시흥현, 남쪽은 진위현, 동쪽은 용인현, 서쪽은 남양현, 안산현의 지도를 모두 수록했다. 그리고 상위의 경기도지도, 조선 전체지도, 세계지도를 수록했다. 수원의 옛 지도책이 27×39cm, 240쪽 분량으로 탄생했다.

경기도지도. 여지도(與地圖)에 수록. 18세기중엽 38×28cm.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경기도지도. 여지도(與地圖)에 수록. 18세기중엽 38×28cm.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동국도(東國圖) 여지도(輿地圖)에 수록. 1822년 34.5×30.6cm. (사진=고려대 도서관 소장)
동국도(東國圖) 여지도(輿地圖)에 수록. 1822년 34.5×30.6cm. (사진=고려대 도서관 소장)
천하도(天下圖). 대동지도(大東地圖)에 수록. 1800년 71×90cm.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천하도(天下圖). 대동지도(大東地圖)에 수록. 1800년 71×90cm.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수원의 옛 지도 제작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했다. 오랫동안 연구한 옛 지도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수원 옛 지도 제작에 봉사해주신 이상태 박사님과 이우형 선생님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이 책의 교열 교정 작업엔 김우영 당시 늘푸른수원 편집주간(현 수원일보 논설위원)과 한동민 박사(현 화성박물관장)가 참여했다. 

자료 수집은 지준만 박사(현 영통구 종합민원과장)가 했다. 업무추진은 최호운 박사(현 화성연구회 이사장)가 했다. 총괄은 도시계획과장인 내가 주관했다. 수원의 옛 지도책은 화성연구회 6명이 기획부터 교정까지 참여해 만든 성과물이었다.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썼다. 수원옛지도책은 1000부를 제작해 국내 도서관, 대학교, 연구기관, 인접 시.군, 수원시 기관 등에 배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수원을 연구하는 자료로 쓰임은 물론 각종 자료에 사용되고 있어 역사문화도시의 자긍심을 갖게 하면서 중요한 자료가 됐다.

다음호에는 수원시 도시계획 200년사 편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도시계획학박사 김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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