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전도(화성성역의궤). 행궁뒤 왼편 작은 건물이 성신사. (자료=수원시)
화성전도(화성성역의궤). 행궁뒤 왼편 작은 건물이 성신사. (자료=수원시)

세계유산등재 후 화성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화성연구회 또한 화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설립된 단체이다. 화성연구회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성신사(城神祠)였다. 

‘성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 병풍바위(屛巖) 앞 유좌묘향(酉坐卯向),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병진년(1796년) 봄 특교(特敎)로 집터를 잡으라는 명령이 계셔 택일하여 사당을 지었다.’라고 ‘화성성역의궤’는 기록하고 있다.

성신사 전도(화성성역의궤). (자료=수원시)
성신사 전도(화성성역의궤). (자료=수원시)

정조대왕은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좋은 날을 가려 성신묘(城神廟)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때에 맞춰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에게 수(壽)를 주고 복(福)을 주며 화성이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조가 제문(祭文)을 직접 짓고 향을 내릴 만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곳이 성신사였다. 

그러나 성신사는 기록에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성신사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당시 늘푸른수원 김우영 편집주간(현 화성연구회 이사, 수원일보 논설위원)이었다. 그는 성신사가 화성전도에 화성행궁 뒤편 팔달산 왼편 기슭에 위치하며 병풍바위 앞에 있다고 했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유좌 묘향을 그려볼 때 성신사의 위치로 추정할 곳은 강감찬 장군동상 위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화성연구회는 2001년 신년 행사로 성신사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올리기로 했다. 장소는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서 약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화성연구회는 매년 첫 모임때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서 고유제를 올렸다. 

2002년 성신사 고유제 제문.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2002년 성신사 고유제 제문.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2004년에는 화성연구회가 주축이 돼 강감찬 장군동상 주변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기전문화재 연구원에서 매장문화재 발굴을 담당하던 정해득 박사(현 한신대교수)가 주관했다. 

당시 함께한 사람은 김우영 늘푸른수원 편집주간, 이달호 학예사, 김충영 화성사업소 시설과장, 최호운 박사, 이용창 수원시 사진담당이 참여했다. 

여러 사람이 흩어져 성신사 흔적 찾기에 나섰다. 일행은 ‘왕(王)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 몇 점을 수거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화성연구회는 2005년을 '성신사 중건의 원년'으로 정했다. 고유제는 2005년 4월 9일 강감찬 장군 동상 옆에서 김이환 화성연구회 초대 이사장이 주관했다. 

2002년 성신사 터에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2002년 성신사 터에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고유제 이후 김이환 이사장은 김용서 수원시장에게 면담요청을 했다. 면담자리에는 화성연구회 간부 몇 명이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김이환 이사장은 김용서 수원시장에게 성신사 복원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복원사업비를 시민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성신사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화성연구회의 건의에 김 시장은 학술적 근거와 시민홍보를 요청했다. 화성연구회는 김 시장의 관심에 고무돼 우선 성신사 터를 알리는 화성전도 푯말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범 시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성신사 터를 알리는 화성전도 푯말 앞 기념사진.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성신사 터를 알리는 화성전도 푯말 앞 기념사진.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그리고 성신사 관련 문헌들을 찾아 내고 성신사 관련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 김용서 시장은 수원시 금고를 맡고 있는 중소기업은행을 설득, 성신사 건립비용 전액을 담당하겠다는 승락을 받아냄으로써 성신사 복원사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그러자 강감찬 장군 동상이 걸림돌이 됐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조상건립위원회를 만들어 각 도에 위인의 동상을 만들도록 했다. 수원에는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 장군이 ‘배정’됐다. 강감찬 장군은 948년 낙성대에서 태어났다.

강감찬 장군 동상 이안 고유제 사진(제관 김충영),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강감찬 장군 동상 이안 고유제에서 제관인 필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낙성대가 있는 신림동은 1963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서울시 영등포구 신림동으로 편입됐다가 1973년 관악구 신림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강감찬 장군과 수원과의 인연은 없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 동상을 낙성대에 옮겨주는 것은 어떨까하고 서울시 관악구에 공문을 보냈다. 

강감찬 장군 동상을 이안하는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강감찬 장군 동상을 이안하는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낙성대에는 이미 1997년 관악구청에서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을 건립했기 때문에 동상을 받을 수 없다는 회신이 왔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수원에서 이전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전지로 여러 곳이 거론됐으나 거란(대륙)을 바라보는 광교공원 입구 서향으로 결정했다. 2007년 10월 27일엔 강감찬 장군동상 이안(移案) 고유제를 화성사업소장인 필자가 주관해 올렸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박사 

성신사(城神祠)를 중건한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광교공원에 이안된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광교공원에 이안된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