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어떤 일이든 희망이 없다면 아예 기대를 포기하고 깔끔히 손을 떼야 하는 게 순리다.

동서고금에도 일찍이 이러한 진리를 설파한 문구가 많다.

고사성어 견승즉기 불승즉지(見勝則起 不勝則止)  ‘승산이 보이면 일어서고 승산이 없다면 미련을 버리고 물러나라’는 말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어디 그런가.

조금의 가능성만 보이면 거기에 희망을 걸고 어떻게든 절망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 지나가는 고통의 과정을 오롯이 감내하면서 말이다.

일찍이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간파한 철학자 ‘니체’는 ‘희망’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희망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엔 이같은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희망고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말의 뜻이 더 실감난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어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 설명해 놓고 있어서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이 있다.

내용중 “주인공들은 언제나 오게 될지 정말로 오기나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고도는 내일 온다고 소식을 전한다. 이것이 반복된다. 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고도는 오지 않는다” 라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Nothing to be done)라는 대사다.

지금도 희망고문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최근의 우리 사회가 마치 이러한 형국이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면 더욱 실감난다.

그가 남긴 유명한 에피소드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상의 희망에 대한 에피소드다.

늘 세상을 어둡게만 바라보는 카프카에게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어느 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자네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카프카가 대답했다. “희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 하지만 그 많은 희망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네.”

카프카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희망은 현실속에서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 실현 불가한 기대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일 뿐이어서 더욱 그렇다.

코로나 19 델타변이의 창궐로 최근 ‘희망고문의 시대’를 한탄하는 이들이 주변에 늘고 있다.

아니 벌써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희망을 버리고 좌절과 포기에 나서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알기나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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