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혈연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입양은 있었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휴먼’정신이 바탕이다.

거기엔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르게 길러보려는 국가의 숨은 노력도 담겨 있다.

정조가 재임 7년 1783년에 선포한 자휼전칙(字恤典則)은 이러한 정신을 담고있는 대표적 법령이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전염병이 발생해 부모가 죽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나, 흉년과 가난 때문에 부모한테서 버려진 아이들을 구휼(救恤)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거기엔 수양(收養), 즉 남의 자식을 기르게 하기 위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사회적 편견이 고착화 되어있던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 법령이다.

아울러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어서인지 부모없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철학이 담겨있는 것도 엿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걸식아이는 진휼청(賑恤廳)이라는 전문관청에서 11살이 될 때까지 구호해 옷을 주고 병을 고쳐주도록 했다.

구호대상자인 어린이 걸식자는 부모 및 친척, 또는 주인이 없어 의탁할 수 없는 4세부터 10세까지의 어린이로 규정했다.

특히 버려진 아이는 3세 이하의 유아로 못 박아 특별 관리하기도 했다.

풍.흉년에 관계없이 매일 똑같은 양의 식사를 제공케 했다.

아주 어린 아이에게는 유모를 정해 젖을 먹이고, 유모나 거두어 기른 사람에게도 양식을 지급했다. 지금의 국가운영 고아원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입양은 까다로웠다.

백성 아무나 원한다고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진휼청의 입안(立案)을 받도록 했다.

대상은 자녀나 심부름꾼이 없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했다고 한다.

지금의 입양제처럼 심사를 거치게 한 셈이다. 정조는 이 제도를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측근 정약용을 어사로 임명해 전국을 돌며 이를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토록 했을 정도다.
 
정조의 이러한 철학에 영향을 준 사람은 조선중기 헌종때 대사헌 민정중(閔鼎重)이다.

당시 조선은 궁핍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에 자식을 낳은 뒤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가 숱하게 많았다.

그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왕에게 건의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관아에서 거둬 보살피고 만약 기를 처지가 못되는 아이의 부모가 도움을 요청하면 새로운 양부모를 물색해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건의의 골자였다.

민정중의 이같은 '유기아수양론(遺棄兒收養論)'은 이후 숙종 21년 만들어진 '유기아수양법'의 기초가 됐고 정조는 이를 바탕으로 법령을 만들어 백성이 따르게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의 입양 역사는 어느덧 수백년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입양에 대한 편견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아직도 입양아를 보는 사회적 측은지심이 잔존하고 있다.

해서 입양 당사자는 철저히 숨겨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작 많은 입양 가족구성원들은 끈끈한 가족사랑을 외부와 공유하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최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향해 더불어민주당 전 부대변인이 '아이 입양을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하자 최 전 원장의 입양 아들이 "나는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입양편견’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아울러 편견 거론 정치인에 대한 비판여론도 거세다.

어쩌다 입양이라는 인간 사랑의 문제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현실이 됐는지 안타깝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