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수원이 텅 빈 것 같다. 술꾼들이 사라졌다.

사진 찍는 ㅇ형은 1박2일 일정으로 설악산 산행을 떠났고, 시 쓰는 ㅈ은 목포에서 문학행사가 있다고 희희낙락 기차를 탔다. 항상 술자리를 즐겁게 해주는 ㄱ은 두 아이들과 강화도 여행길에 올랐다. 역사학자인 ㅇ은 후배 국회의원이 잘못됐다고 오늘 아침까지 작취미성.

수원에 나 혼자 남았다.

“이것들이...오냐, 나도 떠나자” 작은 가방을 둘러메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서해 바다 쪽으로 길을 잡았다. 궁평항에서 내려 국화도 가는 배를 탈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일 오전까지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아직 쓰지 않았다. 1박2일은 안되겠다. 이거 도시계획박사 ㄱ형에겐 미안하지만 노트북은 ‘낭중에’.

할 수 없이 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내려 목적지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때 35번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발안 가는 차다. 아, 그러고 보니 발안 가본 지가 꽤 오래됐다. 농학박사인 김재철 형님이 거기 살 때였으니 벌써 6~7년은 됐다.

그래, 오늘은 발안으로 가자.

오랜만에 간 발안은 신천지였다. 읍내엔 한국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다. 상점도 중국, 미얀마, 태국, 몽골, 베트남과 국가이름에 ‘스탄’이 들어가는 나라사람들이 운영하는 식품점과 음식점이 주를 이뤘다.

오, 이거 음식 먹으러 외국 갈 필요 없겠다. 여기 오면 한 번에 해결되겠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5일장인 발안장도 서서 읍내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참 잘 왔다. 여기서 거리를 구경하며 놀다가 베트남 ‘족제비커피’도 한잔 마시고 출출해지면 ‘스탄’ 음식점에 가서 오랜만에 난과 양고기 ‘샤슬릭’, ‘사마르간트 샐러드’도 먹어보자. 맥주도 그쪽 동네 것으로 적당한 게 있으면 한잔 할 거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내 판단은 옳았다. 그날 비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후퇴다. 봉담에서 조그만 고기구이 집을 차린 유성재 아우네 집으로 가자. 비가 제법 내리니 그 집 주인도 장의자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청하고 있다. 주방장까지 불러내 맥주 한잔씩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 창밖을 보니 오목천동이다.

오목내 삼거리. 지금은 사거리가 됐다.(사진=김우영 필자)
오목내 삼거리. 지금은 사거리가 됐다.(사진=김우영 필자)

나도 모르는 이끌림에 급히 차에서 내렸다.

‘오목내 삼거리’(현재는 사거리로 바뀌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한참동안 서 있었다. 수원행 버스가 몇 대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아, 아버지!

오래 전 오목내 삼거리에는 아버지가 단골로 다니던 술집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삼거리에서 수원 방향 오른쪽 경사 아래에 있는 ‘오목옥’이었다. 이른바 ‘색시집’이었다. 돈이 조금 생기면 아버지는 오목옥에 가셨다. 그래도 어머니 눈치가 보였는지 가끔씩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예쁜 한복을 입은 젊은 아줌마가 소고기무국에 하얀 쌀밥을 말아 주곤 한 것이다. 그때가 다섯 살 정도 됐을 것이다. 흰쌀밥에 쇠고기국이라니. 철없던 나는 가끔 아버지를 졸라 오목옥에 가자고 했던가.

오목옥이 있던 골목. 자동차 못미처 오른쪽에 있었다. (사진=김우영 필자)
오목옥이 있던 골목. 자동차 못미처 오른쪽에 있었다. (사진=김우영 필자)

밥을 잘 먹은 나는 금방 곯아떨어지곤 했기에 그 뒷일은 모른다. 어렴풋이 잠이 깨어보면 아버지 등이었고 오밤중 숲이 우거진 동네 당집부근을 지나는 중이었다. 때로는 삼촌 중 한분이 대취한 아버지를 마중 나와 있기도 했다.

또 한집은 삼거리에 있었는데 옥호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실비집’ 정도가 아니었을까. ‘색시’들은 없는 집이었다. 군대 가기 전 동네친구들과 이 집에 드나들었는데 여기서 아버지를 만났다. 이후 아버지는 이 집에 발길을 끊으셨다.

실비집(?)이 있던 자리엔 새 건물이 들어섰다. (사진=김우영 필자)
실비집(?)이 있던 자리엔 새 건물이 들어섰다. (사진=김우영 필자)

‘부자유친’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 또래 사내들은 아버지와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이들에게 그랬다. 사랑의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다. 요즘 아빠와 아들·딸들이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면 부럽고 내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2013년 수원시가 생태교통 축제로 떠들썩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한 해 전 어머니가 먼저 가셨기에 면역이 됐는가, 슬픔이 약간 덜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졌다. 이제는 그 술주정도 어느 정도는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동생들은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닮아간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날 술 덜 깬 아침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보는데 아버지가 거기 계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지독한 술꾼이어서 한때는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내가 거울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글을 보내고 난 다음 봉담 유성재 아우네 고깃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오는 길 오목내 삼거리를 지나게 될 것이다. 삼거리에 호프집이 있던데 거기 들러 입가심으로 한잔할까?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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