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유원지 입구 모습. (사진=수원시)
원천유원지 입구 모습. (사진=수원시)

1928년 용인군 하리 일원에 신대(新垈)저수지 윗방죽이 축조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9년 여천(驪川)아랫방죽 원천저수지가 용인군 이의리에 조성됨으로 인해 하류 수원지역의 농업용수로 활용됐다. 2개 저수지의 행정구역은 용인시였으나 수원경계 지점에 있어 수원시민들의 여가·휴식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47년 원천저수지 일원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47년 원천저수지 일원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2년 1월 20일 도시계획법이 제정됐고 1967년 7월 3일 최초로 수원도시계획이 수립됐다. 도시계획구역은 수원시 행정구역 전체와 화성군, 용인군 일부지역을 포함한 83.667㎢였다. 이 가운데 3.839㎢(116만1300평)가 원천유원지로 결정됐다. 

수원시장기발전 구상도(1967년). (자료=수원시)
수원시장기발전 구상도(1967년). (자료=수원시)

그리고 1977년 3월 31일 관광사업법에 의한 원천국민관광지로 중복 지정됐다. 이는 국·도비 지원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국·도비를 지원받아 추진된 최초의 사업은 1981년 원천저수지 입구와 제방 하단부의 편익시설 단지였다. 

국민관광시설 편익시설 단지조성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국민관광시설 편익시설 단지조성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원천유원지는 참으로 제약이 많았다. 행정구역은 용인군이었지만 수원시 도시계획구역이어서 수원시 도시과가 인허가를 했다. 국민관광지는 관광사업법의 적용을 받기에 수원시 문화공보실의 소관이었다. 그리고 신대저수지와 원천저수지는 수화농지개량조합 소속이어서 수상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화농지개량조합으로부터 공유수면 점용허가를 얻어야 했다.

원천유원지는 2개 시.군에 걸쳐 있었으며, 관련법은 3개법으로 도시계획법과 관광사업법, 공유수면관리법이 적용됐다. 담당부서는 수원시 도시과와 수원시 문화공보실, 농지개량조합, 용인군이 담당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까다로운 사항은 유원지와 국민관광지는 전체면적을 대상으로 조성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조성계획에 포함된 사항만 인허가가 가능했다. 

그래서 농가주택을 새로이 지을 경우와 개량하는 경우에도 전체 조성계획을 변경해야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이행되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유원지내에서 개인적인 개발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주민들은 개발제한구역보다 더 규제가 심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복잡한 체계로 인해 원천유원지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수원시와 용인군에 불만을 가지게 됐다.

이런 가운데 원천유원지 업무는 수원시 도시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저수지 내에서의 행위는 수화농지개량조합과 용인시의 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물집은 수궁, 용궁, 광나루 등이 있었다. 보트영업 또한 같은 경우였다. 당시 풍문에는 원천유원지에 370개가 있어 우리나라에 있는 보트의 절반은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행정의 이원화, 삼원화는 원천유원지 난개발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원천유원지는 난개발에 이은 단속의 부재로 수질이 악화됐다. 1980년대 중반 수원시 산업과장을 하다가 경기도 관광과로 올라간 수원출신 홍순표 계장이 있었다. 이 분은 원천유원지 조성이 답보상태에 빠지자 골프장을 조성하는 시행사에 원천유원지에 플장을 만들도록 권유했다. 

이는 골프장을 만들 경우 필히 국민관광시설을 조성해야 했다. 홍 계장은 국민관광시설인 플장을 골프장에 만드는 대신 원천유원지에 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태광골프장은 점보풀장, 수원컨트리클럽은 파도풀장을 만들었다. 삼풍골프장은 관광호텔을 짓도록 했는데 부지만 마련하고 호텔은 짓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자 원천유원지를 종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원천유원지가 수원시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1983년 2월 15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가 수원시에 편입됐다. 그리고 1993년 7월 10일 국민관광지가 폐지됐다. 이렇게 하여 다소 행정절차는 간소화되었으나 유원지내에서의 행위는 원활하지 못했다. 

이런 사항으로 원천유원지 내 거주자와 토지 소유들은 해마다 농한기가 되면 수원시청에 와서 집단행동을 하곤 했다. 당시 주민대표로 활동한 심상찬씨는 1991년 최초로 실시된 지방의회 시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그리고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시행일이 1995년 7월 1일로 결정이 됐다. 

관선시절 제20대 이상용 수원시장은 민선시대가 오면 화장장, 쓰레기소각장, 하수처리장등 혐오시설 추진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상용 시장은 혐오시설 입지 결정을 서둘러 추진했다. 그 결과 수원시 화장장이 수원시 하동 현재 수원시 연화장 자리로 결정됐다. 그러자 주민들은 가뜩이나 원천유원지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데 화장장까지 오느냐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수원시 연화장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시 연화장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그러자 수원시는 이의동과 하동을 관할하는 이의동 주민들에게 장례예식장 운영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원천유원지와 화장장은 큰 무리 없이 추진됐다. 이후 민선1기 심재덕 시장은 수원시가 문화관광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컨벤션센터 건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입지를 이의동으로 정했다. 

수원컨벤션센터(2000년) 착공식 모습. (사진=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2000년) 착공식 모습. (사진=수원시)

사업시행자는 현대 그룹을 선정하여 협약을 체결하고 2000년 5월 3일 수원컨벤션센터 착공식까지 추진했다. 더불어 화성관망탑, 영상테마파크, 세계성곽미니어쳐공원을 계획했는데 이들은 원천유원지내 미개발지에 입지를 결정했다. 

이 사업은 민선1기 심재덕 시장의 중점 사업이었으나 당시 임창열 경기도지사와의 갈등으로 한발도 내딛지 못했다. 심재덕 시장은 2002년 민선 3기에 도전했으나 김용서 시장에게 패하면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수원컨벤션센터는 이루지 못하고 수원시장직을 물러나게 됐다.

이어 민선 3기 김용서 시장이 취임했다. 대한주택공사는 수원시 이의동, 하동, 용인시 상현동 일원 약 230만평에 이의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겠다며 택지개발예정지구지정신청서를 수원시에 가지고 왔다. 수원시는 관련 공문서를 경기도를 경유 건설교통부에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손학규 경기도지사로부터 이의지구 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하여 협의할 사항이 있으니 수원시장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용서 시장은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필자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경기도는 당시 이의지구(후일 광교택지개발사업으로 명칭변경)를 경기도와 수원시, 용인시가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김용서 시장은 큰 원칙에는 동의한다는 의견을 냈다. 구체적인 사항은 협약서를 만들어 추진하기로 했다. 대한주택공사에서 간부로 근무하다가 손학규 지사가 영입한 한현규 정무부지사가 이의지구 택지개발사업을 대한주택공사가 하겠다는 것을 경기도가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원천유원지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원천유원지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그리하여 원천유원지는 개발계획 수립과정에서 유원지 기능을 배제하고 광교택지개발사업지구내 공원으로 계획했다. 이렇게 하여 원천유원지는 오늘의 광교호수 공원이 됐다. 원천유원지내에 있던 위락시설은 수상가옥 5동, 수영장2개, 유원지입구 주차장, 대규모 야영장, 심신단련장이 있었다.

그리고 원천그랜드, 원천호수랜드, 모터보트와 유선370여척, 각종 어린이 위락시설 등이 모두 보상을 받고 모두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수원시의 끈질긴 노력으로 광교택지개발사업지구 호수공원 옆에 수원컨벤션센터 부지를 반영했다. 

그러나 수원시가 요구한 컨벤션센터 부지를 조성원가로 수원시에 공급하는 법규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애를 태우게 했다. 종국에는 부지를 축소하는 등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광교택지개발사업 수익금 배분 차원에서 수원시의 요구가 반영됐다. 

수원컨벤션센터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컨벤션센터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는 결국 수원컨벤션센터 부지가 축소돼 완벽한 컨벤션센터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광교택지개발사업은 경기도, 수원시, 용인시가 공동으로 추진한 사업이었으나 경기도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원컨벤션센터는 원천저수지 광교호수공원 옆에 건립됐다. 이는 심재덕 전 시장이 그토록 원했던 사업이 2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원천유원지는 수원사람들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는 장소였다. 봄철에는 수원사람들은 물론 경향각지에서 찾아와 보트놀이를 하던 곳이다. 그리고 수원지역 초등학교 소풍장소이기도 했다. 5월 어린이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이다.

그리고 봄가을 이면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들과 피로연을 하던 곳이다. 가을이면 중·고등학생들 졸업앨범 사진 촬영지가 됐다. 필자와의 인연도 많다. 공무원 시절 도시계획을 하는 동안 유원지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1981년 신혼여행을 가기 전 친구들과 피로연을  했던 장소다.

광교호수공원 전경. (수원시 포토뱅크)
광교호수공원 전경. (수원시 포토뱅크)

나들이 철에는 유선업(놀이배) 안전 지도 요원으로 원천유원지에 나가 근무를 했다. 광교택지개발사업으로 원천유원지가 없어진다고 해 서운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아침운동으로 광교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