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가 지난 4일 고(故) 이동안 선생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함백산추모공원 내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안장했다는 소식이다. 선생은 화성시 출신의 한국 민속무용의 대가로서 중요무형문화재 79호 발탈 기능 보유자였다. 이날 제23회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인 고 김원기 씨도 특별 묘역에 묻혔다.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은 지난 2017년 조성계획이 발표됐다. 화성시는 그해 11월 22일 매송면 숙곡리 함백산추모공원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 사업부지에서 사업성공 기원식을 개최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 빈 중앙묘역이나 프랑스 파리 예술인 묘역처럼 많은 방문객이 찾아와 예술인과 체육인들을 추억하고 전시공연을 즐기는 문화특구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특화묘역 규모는 1245㎡에 66기 안장이 가능하다.

이날 성공기원식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고 이동안 선생의 아들 이건호 씨 등 고인들의 유족과 배우 최불암, 최종원, 도지원, 엄용수, 염정아 등 연예인이 참석했으며, 김응용 전 야구국가대표 감독,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축하 메시지도 보내왔다.

특히 배우 최불암씨는 사업 성공을 기원하는 시를 낭독한 뒤 “문화예술체육인들이 모여 단합할 수 있는 공간인 특화묘역 조성사업에 지지를 표하며, 많은 콘텐츠가 모여 훌륭한 문화특구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말도 했다.

당시 이 기사를 읽으면서 화성시가 작고한 문화체육예술인에 대한 예우를 참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함백산추모공원 내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안장된 운학 이동안 선생. (사진=화성시)
함백산추모공원 내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안장된 운학 이동안 선생. (사진=화성시)

특화공원에 첫 번째로 안장된 이가 이동안 선생이라는 게 기쁘다.

나는 선생의 공연을 한번 밖에 보지 못했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공연이었던 것 같은데 1993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오산운동장 옆에 있는 문화회관(체육관도 겸했다)에서 공연이 열렸다.

지금 오산엔 번듯한 공연장이 생겼지만 당시엔 이곳이 유일한 실내 공연장이었다. 그러니 조명도 음향도 형편없었다. 관중들도 사방이 휑하니 뚫린 스탠드에 앉아 운동경기를 보듯 관람해야 했으므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수선한 공연환경이었다.

그럼에도 80중반을 넘겨 몸이 불편한 노인은 한 손짓 한 걸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혹시나 공연 중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가슴 졸였지만 ‘진쇠춤’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장악했고 객석을 압도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작고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말년을 수원 화령전(수원시 신풍동 국가 보물 제2035호) 풍화당에서 지내며 재예를 가르치다 세상을 떠났다. 딸처럼 그를 수발하던 승무ㆍ살풀이춤 경기주요무형문화재 제8호 정경파 선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선생은 ‘우리시대의 마지막 광대’였다. 또 조선조의 마지막 재인청 도대방(都大房)이었다.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발탈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그러나 살풀이·태평무·승무·진쇠춤·검무·희극무·선달무·북춤·소고춤 등 17가지의 춤에 능했고, 어름산이(줄타기)·대금과 태평소·남도잡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예 모두 인간문화재 급이란 평가를 받았다.

선생은 1906년(광무 10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재인청의 도대방을 지낸 경기도 세습무 집안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당시 화성 재인청은 오늘날 예술인총연합(예총)과 같은 기능의 예술인 총괄기관으로 악(樂)·가(歌)·무(舞)·음(音)·곡(曲) 등 국악교육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는 14세 때에 3대째 도대방을 지냈다. 조부 대를 잇던 부친이 도대방 직을 사양하자 후임 선출을 위한 청회(재인청 총회)에서 약관 14세의 소년이었던 선생이 도대방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3년 뒤 민족혼을 심는다하여 일제가 재인청을 해산시켰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재인청(혹은 神廳이라고 함) 도대방(都大房)이었던 것이다.

1995년 현암사가 펴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은 “이미 스무 살 전의 자그마한 체구에 당시 광대가 할 수 있는 재능은 모두 담아 버렸다”며 “재주꾼 이동안의 소문은 장안에 자자했고 어딜 가나 최고 대우였다. 벌 날듯 줄을 타는 솜씨는 소 두 마리 값을 받는 최고 대우였고, 열광한 구경꾼 팁은 하룻밤에도 한 달 봉급이 넘었다. 24세 때는 수원 권번 선생을 하며 몸에 밴 재능을 가르쳤고...”라고 소개하고 있다.

화성시에서 태어나 수원시에서 말년을 보내고 생을 마친 운학 이동안 선생.

햇볕 좋은 날, 숙곡리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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