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46)] 광교저수지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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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46)] 광교저수지에 얽힌 이야기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 승인 2021.11.22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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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광교저수지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광교저수지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22년 임술(壬戌)년 7월 27일과 28일 이틀간 내린 폭우로 화홍문과 남수문, 매향교가 유실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수원의 유지들은 명소보존회를 결성하고 시민 모금을 통해 1932년 화홍문을 복원했다. 남수문은 이때 복원에서 제외됐다. 

한편 수원군에서는 홍수방지 대책으로 저수지를 만들고자 했으나 무산됐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 농업용수와 유원지 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기로 하고 1937년 10월 2일 기공식을 가졌다. 저수지 면적은 40정보, 제방길이 300m, 제방높이는 18m로 계획해 1938년 말까지 준공키로 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부터 저수지까지 6m도로를 계획했고, 농업학교 뒤부터 상광교까지 6m도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공사가 지연돼 1940년 12월 11일 준공됐다. 저수지 공사는 근로보국단이 결성되어 각 면별로 참여했다. 심지어 학생들도 동원되어 연인원 20만 명이 참여했다.  

수원시 정수장과 상수도 사업소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시 정수장과 상수도 사업소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52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원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10만4044명이 됐다. 이로 인해 생활용수가 부족하게 됐다. 수원시는 1953년 11월 광교저수지에 취수·정수 시설을 갖춰 상수도 수원지로 인가를 받았다. 이때 수원시 수도사업소가 생겼다. 1958년이 되자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때 제방을 높이는 공사가 추진됐다. 1962년 공사가 마무리되자 취수량은 205만 톤이 됐다.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한 1967년엔 인구가 13만1031명으로 증가했다. 또 다시 생활용수가 부족하자 두 번째 제방높이기 공사가 추진됐다. 300m의 저수지 제방을 7m에서 9m 폭으로 늘리고, 높이 1.5m를 높이고, 저수량은 243만2000톤으로 증가시키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당시 수원교도소 재소자 들이 동원돼 추진됐다. 

이어 1971년 6월 상수원 보호를 위해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뒤이어 1971년 12월 광교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됐다. 이후 급격한 인구증가로 물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한강물을 끌어드리는 공사가 추진됐다. 1974년 4월1일 수도관로 공사가 완공돼 한강물을 먹는 시대를 맞게 됐다. 이어 1981년 10월부터는 수도권광역상수도 사업이 준공돼 팔당에서 정수된 한강물을 받게 됐다. 

1995년 7월 1일 민선시대를 맞았다. 민선1기 시장으로 취임한 심재덕 시장은 광교저수지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유사시 한강물이 오지 못하는 사고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수원은 광교저수지가 있어 1주일은 식수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사시에 대비해 광교수원지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사가 많이 쌓인 광교저수지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토사가 많이 쌓인 광교저수지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심 시장은 이것도 부족해 당시 1개동에 최소 1개소 이상의 지하수 개발을 추진했다. 지하수는 주민들이 많이 활용하는 공원이나 학교에 만들었다. 이때 만든 지하수는 현재까지도 약수터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광교저수지는 1940년 축조된 이래 한 번도 준설을 못한 탓에 유입된 토사가 바닥을 채워 계획 저수량에 못 미쳤다. 

1997년 광교정비 사업을 추진하던 도로과장 시절 친구인 이윤희 수도과장과 광교저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광교저수지 준설을 해야 되는데 예산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생각이 났다. 당시 북수원에 정자지구, 천천지구, 천천2지구, 율전지구, 화서지구 등 여러 곳의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북수원은 평야지역이어서 매립할 흙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택지개발이 완료된 북수원 시가지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택지개발이 완료된 북수원 시가지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그래서 광교저수지 토사를 한국토지공사에 매각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좋은 아이디어를 주었다고 기뻐했다. 그래서 장난삼아 아이디어 값으로 1000원을 받았다. 그 뒤 이 과장은 한국토지공사 관계자를 만나 광교저수지 준설을 협의했다. 

아파트공사 현장과 건축공사장에서 나오는 흙을 받아도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원시의 어려운 여건을 설명해 어렵게 토지공사가 가져가는 것으로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 과장은 저수지 준설 건을 심재덕 시장에게 보고하자 큰 일을 해결했다고 기뻐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물을 빼야 하는데 낚시대회를 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과 상의한 결과 낚시대회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으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대안으로 물고기를 잡아 시민들에게 매각해 수익금으로 광교주민과 불우 청소년 돕기에 사용하자고 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심 시장에게 설득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낚시대회 계획을 수립하게 됐다고 했다. 기간은 1998년 9월 7일부터 15일까지 9일 동안이었다. 낚시대회는 7~11일까지 5일간, 12~15일까지는 매운탕 요리축제를 기획했다. 낚시대회 참가비는 2만원, 낚시대회 참여인원은 4000명을 예상했다. 수익금은 불우청소년 돕기에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광교저수지 낚시대회 모습. (사진=수원시)
광교저수지 낚시대회 모습. (사진=수원시)

수원시는 56년 동안 식수원으로 사용해서 무공해 저수지라는 장점을 홍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전국의 ‘강태공’들은 무공해 저수지에서 붕어, 잉어, 메기, 가물치, 자라 등을 잡을 수 있게 됐다며 잔뜩 기대했다. 그리하여 전화예약이 실시되자 1시간 만에 매진되는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전화예약을 못한 사람은 15만원을 주고 암표를 구해 낚시대회에 참가했다고 한다. 드디어 낚시대회 날이 밝았다. 그런데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만이 터져 나왔다.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을 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동안 낚시터로 개방되지 않아 물고기들이 미끼 무는 법을 모르는데다 녹조까지 발생한 것이 원인이었다. 

광교정비사업을 반대하는 농성 모습. (사진=수원시)
광교정비사업을 반대하는 농성 모습. (사진=수원시)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갑작스럽게 물을 많이 뺀 것도 원인 중의 하나라고 했다. 개발제한구역과 상수원보호구역에 묶여 피해를 당한 광교주민들의 농성도 가뜩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해 불만이 많은 낚시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낚시꾼들은 수원시를 상대로 사기라면서 입장료를 반환해 달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자 TV방송과 신문은 연일 비방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낚시대회가 끝나자 그물을 쳐서 물고기 잡기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물반 고기 반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잡힌 붕어는 보통 30~50cm이었으며, 1m에 가까운 메기와 잉어도 있었다. 물고기 수십 톤을 잡아 kg당 1000원씩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연무동 부녀회는 매운탕 축제를 벌였다. 

물고기축제가 끝난후 물이 모두 빠진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물고기축제가 끝난후 물이 모두 빠진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 때 수입금은 경인일보에 기탁해 불우청소년 돕기에 사용했다. 수원시 수도과는 물고기축제 이후 광교저수지 준설사업을 마무리했다. 수원시 예산 수십억원을 절약하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물고기축제는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낚시대회가 끝나고 1998년 10월 수원시는 인사를 단행했다. 

필자는 도로과장에서 도시계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임으로 이윤희 수도과장이 도로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한 달 여가 지날 때쯤 공직사회는 서정쇄신 바람이 불었다. 그해 2월 25일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부패척결을 기치로 내걸었을 때였다. 

수원지방검찰청에서 이윤희 과장과 수원시청·구청·사업소 계약직 공무원들을 불렀다. 계약직공무원들은 자술서를 써주고 나왔다. 자술서 내용은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관련업체 직원 등과 한 달에 1~2회 정도 식사를 했다는 내용을 썼다고 했다. 

이들은 구속은 되지 않았으나 그 일로 공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윤희 과장은 나오지 못했다. 광교저수지 낚시대회가 물의를 빚자 수원지검은 이윤희 과장을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당시 심재덕 시장은 무소속으로 2선을 했을 때였다. 초선과 재선을 무소속으로 당선되자 정치권에서는 곱게 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낚시대회에서 나온 수입금이 심재덕 시장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이 과장은 축제 수입금은 광교주민과 불우청소년에게 썼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낚시대회를 알리기 위해서 지방일간지에 낚시대회 홍보 광고를 한 것을 알고는 집요하게 광고비를 캐물었다고 한다. 

홍보비 예산이 없자 이 과장이 지인들로 하여금 홍보비를 납부케 한 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결국 광고비 대납을 뇌물로 몰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나의 제안으로 진행된 광교저수지 준설사업으로 인해 친구가 공직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당시 수원지검에서는 수원시청 기술직 간부 몇 명을 소환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자 공직에 대한 회의(懷疑)를 갖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몇 사람이 명예퇴직을 했다. 이들은 정년을 5~6년 이상 남긴 상태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정년이 15년 정도 남은 과장 2명이 국장으로 진급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수원시에서는 4급이 최고 직위였다. 이 사건은 당시 공직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수원시 기술직은 15년 동안 인사적체가 발생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2020년이 되어서 현실로 나타났다. 수원시 기술직(토목직)의 경우 4급 국장자리가 5자리였으나 4급 진급 최소 근무기간인 5년에 미달, 4급 승진자가 한명도 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고기 축제 때 발생한 광고비 사건으로 인해 수원시에서는 광고를 주선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그리고 계약직 공무원들의 소위 ‘접대문화’가 사라졌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광교저수지는 아직도 광교주민들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아름다운 광교저수지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아름다운 광교저수지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시민들은 광교저수지와 수변 산책길, 마루길 벚꽃 터널을 걷고 감상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됐음을 시민들은 알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