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늦었다. 밤 10시가 넘었으니 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았을 것이다.

아, 그렇지 그 집이 있었구나. 장안문 남쪽 수원전통문화관 사거리에서 화홍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큼직한 페인트 글씨로 ‘왕대포’라고 써놓은 집. 간판은 거꾸로 걸려있으니 찾기도 쉽다.(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5-12 정조로886번길 26)

뚱뗑이 왕대포집. (사진=허영만 백반기행 화면)
뚱뗑이 왕대포집. (사진=허영만 백반기행 화면)

내부는 좁다. 한 10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 늦은 시간이라선지 한가하다. 주인에게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싸달라고 주문했다. 이 집의 내부는 흡사 만물상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추억의 영화 포스터, 달마 그림, 국적이 불분명한 도자기, 불상, 탈, 심지어 어디서 가져왔는지 오래된 바이올린도 있다.

이곳에선 막걸리와 감자전, 녹두 빈대떡, 홍어삼합, 어묵탕, 돼지고기 김치찌개, 도토리묵사발 고추튀김 등을 판다.

김치찌개를 끓이는 동안 멀거니 앉아 있기가 무료해 막걸리 반 되를 시켜놓고 '뭐 새로운 물건이 있나' 둘러보는데 벽에 붙은 종이 한 장이 눈에 띈다.

“이 집의 감자전은 6성급 호텔 맛입니다.” 글을 남긴 이는 허영만 화백이다. 허 화백은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다.

‘카멜레온의 시’, ‘오! 한강’, ‘타짜’, ‘사랑해’ ‘식객’,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등 그의 만화를 즐겨보았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많다. 음식을 소재로 한 만화 ‘식객’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를 보지 않은 우리나라 어린이는 없을 것이다. ‘아스팔트 사나이’, ‘비트’, ‘타짜’, ‘각시탈’도 드라마와 영화화 됐다.

허 화백이 다녀간 것으로 보아 ‘백반기행’을 촬영했나 보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맞다. 허 화백과 배우 김혜선씨가 와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19일 방영됐다.)

뚱뗑이 왕대포집을 방문한 허영만 화백과 배우 김혜선씨. (사진=허영만 백반기행 화면)
뚱뗑이 왕대포집을 방문한 허영만 화백과 배우 김혜선씨. (사진=허영만 백반기행 화면)

이 집과 인연은 참 깊다. 1999년에 화홍문을 배경으로 수원천에서 ‘수원화성국제연극제’가 열렸다. 이 연극제는 현재 ‘수원연극축제’로 이름을 바꿨다. ‘수원화성문화제’, ‘수원문화재 야행’과 함께 수원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이 행사 초창기 나는 집행위원으로서 한손 거들었다. 행사 첫날인가 둘째 날인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저, 여기서 막걸리 팔아도 될까요?” 그 사내가 가리키는 곳엔 비치파라솔과 거기에 연결된 플라스틱 둥근 탁자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1000원에 막걸리 대포 한잔을 내주고 있었다. 안주는 마늘종과 돼지껍데기무침이었는데 무료.

마침 출출하던 차에 1000원을 내고 대포 한잔을 쭉 들이켰다. 그게 허락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활짝 웃었다.

그 후 그곳은 연극제 행사요원들의 ‘참새 방앗간’이 됐다. 당시 심재덕 시장도 거기서 대포 한잔을 들이키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왕대포’는 화홍문의 명물이 됐다. 비치파라솔에서 형태를 갖춘 포장마차로 발전했고 그의 누나와 동생도 합세해 번창했다. 그 후 포장마차 단속이 시작되자 화홍문 밖 다리 옆에 거꾸로 간판을 내 건 실내 포장마차를 했다. 누나와 동생도 세류동과 행궁동에 실내 포차와 밥집을 냈다. 동생과 누나는 현재 행궁동 생태교통거리의 맛집으로 소문난 골목집 주인장이다.

세월이 흘러 도시계획에 따라 그 건물도 철거됐고 지금은 화홍문 광장 옆으로 이전, 그의 부인이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나를 비롯한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은 단골손님이었다. ‘뚱뗑이막걸리집’으로 부른 이 집에서 술과 안주를 사다 수원천 제방 위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시절이었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사)화성연구회가 주최한 국제성곽학술대회에 참가했던 외국인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놀았다.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노인들과의 술자리도 이곳에서 가졌다. 지난 2000년 9월 2일 6.15합의에 따라 장기수 노인들이 북으로 송환됐다. 이에 앞서 8월 22일 오후 2시 환송행사인 '비전향장기수 송환 축하 문화공연'이 수원포교당(수원사)에서 열렸는데 40여명의 장기수노인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내가 쓴 ‘통일의 이름으로 다시 오시라’라는 시가 낭독됐다. 이 시는 작곡가 유익상 씨에 의해 노래로도 만들어져 가릉빈가소년소녀합창단이 공연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 노인들을 뚱뗑이막걸리 집으로 모셨다. 용연 옆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막걸리를 대접했다. “고맙다. 통일 되면 꼭 다시 만나자”며, “통일돼서 평양으로 오면 술 한번 거나하게 사겠다”고 했는데 벌써 21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당시 송환된 63명의 노인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겨우 15명이란다.

그분들과 평양에서 술 한 잔 할 수 있을까? 안타깝다.

이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일들이 생각난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주 고객층이던데 세월이 흘러 나처럼 흰머리가 되면 어떤 추억을 떠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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