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칼잽이(11)] 숙종(肅宗), 병환 중에도 군사들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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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의 칼잽이(11)] 숙종(肅宗), 병환 중에도 군사들을 위로하다
  • 최형국 박사
  • 승인 2022.04.2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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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 역사학 박사 /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
『진법언해』 중 일부. 『진법언해』의 저자는 1694년 삼도수군통제사(제 70대 통제사)를 역임한 최숙(崔橚)이다. 숙종이 총애한 장수이자, 군사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이 병서를 통해 조선시대 실제 군령의 발음형태나 움직임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진법언해』 중 일부. 『진법언해』의 저자는 1694년 삼도수군통제사(제 70대 통제사)를 역임한 최숙(崔橚)이다. 숙종이 총애한 장수이자, 군사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이 병서를 통해 조선시대 실제 군령의 발음형태나 움직임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숙종(肅宗)하면 떠오르는 것이 환국(換局) 정치다. 46년의 재위 기간 중 3번에 걸친 환국을 통해 숙종은 ‘정치의 달인이자, 신하들의 무덤’이라는 표현에 걸맞는 군주가 되었다. 마치 삽겹살 불판을 갈아 치우듯, 정권에 탄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숙종은 어김없이 ‘정치 판갈이’를 했다. 그렇게 숙종의 왕권은 더 강해져 보였다.

동인(東人)의 후예이자 국왕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남인(南人)의 세상으로 시작했던 숙종초기 서인(西人)들은 호심탐탐 기회만을 엿보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남인들이 세력을 모았지만, 서인의 영원한 스승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거기에 허적은 스스로 제 몸뚱이를 자르듯 청남세력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남인의 뒷통수를 세차게 때리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이 벌어졌다. 어제까지 삼정승 육판서를 휘어잡던 남인은 골방에 쳐 박혔고, 그 자리를 고스란히 서인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십년도 못가서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꿰찼다. TV 사극 드라마 중 가장 악녀로 묘사되는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장희빈’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장옥정(張玉貞). 숙종의 정비였던 민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그가 훗날 경종이 된다.

그 과정에서 남인은 희빈장씨의 아들을 세자로 정하는 일에 적극 동조하면서 정권을 되찾게 된다. 당연히 그 사안에 반대하던 서인은 다시 골방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서인의 지지를 받던 왕비 민씨는 이때 폐비가 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마지막 환국이던 갑술환국(甲戌換局:1694년)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궐밖으로 쫓겨났던 민씨는 인현왕후로 복권되었고,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당하고 남인역시 서울에서 먼 곳으로 길고 긴 유배를 당했다. 그렇게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오직 살아남는 자는 ‘국왕’ 뿐이다 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숙종이 그 과정에서 가장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군사들이었다. 『무예도보통지』의 「병기총서(兵技總敍)」를 보면 숙종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다. 숙종 말기인 1714년(숙종 40년) 즈음에 국왕은 자주 아팠다. 병든 숙종은 내전에서 자리를 깔고 누워있으면서도 주변의 호위무사와 장사들을 따로 불러 놓고 고생한다며 술잔을 내렸다. 늘 창덕궁 후원인 춘당대에서 활을 쏘며 무사들과 시간을 자주 보냈던 숙종은 자신의 몸이 병들자 더 그들을 찾았다.

숙종이 내린 술을 받은 군사들은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그 은혜에 감복했다. 실제로 문장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숙종은 중궁(中宮)의 내전(內殿)을 겸한 침전(寢殿)인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앞 뜰에서 별군직(別軍職)들을 불러 모아 과감하게 말을 달리며 펼치는 마상무예를 펼치라 명하기도 하였다. 그 날 시험에서는 일반 훈련에 사용하는 것보다 아주 작은 ‘소적기추(小的騎蒭-작은 짚인형 모형의 표적)’를 활용하여 정밀한 마상궁술의 묘미를 살폈다.

특히 이 날 참가한 ‘별군직’이라는 호위무관들은 충성의 상징 부대였다. 이들은 병자호란때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간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 효종)을 끝까지 배종한 군관들의 자손들이었다. 이름하여 ‘팔장사군관(八壯士軍官)’이다.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晉翼)·오효성(吳孝誠)·조양(趙壤)·장애성(張愛聲)·김지웅(金志雄)·박기성(朴起星)·장사민(張士敏) 등 8명인데, 효종이 즉위와 동시 공식적으로 국왕 친위부대로 독립시켰다. 그들의 자손들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충성’을 상징하는 국왕 최측근 호위부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숙종은 1720년 1월 8일 육순(六旬)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해 6월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가장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것이 자신과 같이 늙어가던 무신(武臣)들이었다. 주변의 신하들이 나이가 많은 장수(將帥)들은 ‘곤임(閫任)’ 즉,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사와 같은 현장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하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나 숙종은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가 남만(南蠻)을 토벌했던 ‘마원(馬援)’ 장군에게 ‘늙었지만 강건하구나(矍鑠哉 是翁)’라고 칭송했던 것을 고사를 이야기하며 늙은 무신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특히 마지막에는 나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우활(迂濶: 사려 깊지 못하고 세상물정을 모름)’하다고 하며 두 번 다시 나이에 관해 논하지 말 것을 못 박았다. 

또한 숙종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군사들을 위해 최초로 언해 즉 한글로 병서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보급했다. 그 한글 병서가 『진법언해』다. 장교 이상의 군관들은 한자를 배워 활용했지만, 일반 군사들의 경우는 한자에는 눈이 어둡고 한글인 언해만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경우 언해로 만든 병서가 그 이전에도 존재하기는 했다. 보통은 한문본을 먼저 만들고 이것을 다시 한글로 재번역을 거쳐 언해본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진법언해』는 시작부터 한글로 만들어 군사들이 읽기 쉬운 방식으로 보급한 것이다. 

그 중 몇 대목을 보면 이렀다. “오ᄒᆡᆼ딘법-홍긔ᄅᆞᆯ 셰오고 슈긔로 앏플 향ᄒᆞ야 ᄀᆞᄅᆞ쳐는에 딘을 티라 쳥긔ᄅᆞᆯ 셰오고 슈긔로 왼디고을 향ᄒᆞ야 ᄀᆞᄅᆞ쳐든 딕딘 운티고 황긔ᄅᆞᆯ 셰오고 슈긔로 ᄉᆞ방을 ᄀᆞᄅᆞ쳐든 방딘을 티고 ᄇᆡᆨ긔ᄅᆞᆯ 셰오고 슈긔로 올흔녁훌 ᄀᆞᄅᆞ쳐든 두렷한 딘을 티고 거믄긔를 셰오고..”

조선후기에도 쉽게 활용했던 ‘오행진법(五行陣法)’을 설명한 대목이다. 붉은 색을 비롯한 오방색의 깃발 세우고 손에 들고 다니며 지휘하는 작은 깃발은 수기(手旗)를 이용하여 다양한 진형을 변형시키는 내용이다. 

TV사극에서 전투장면을 보면, 장수가 오로지 목청껏 소리를 질러 군사들을 지휘하는 부분이 주로 등장한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은 이런 사료가 남아 있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수기 하나에 큰 깃발 하나만 있어도 군사들은 움직인다. 아니 더 정교하게 지휘할 수 있는 방법도 많다. 볼 때마다 아쉽기만 하다.

아무튼 숙종대 군사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오래도록 군사들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훗날 정조가 즉위한 후에도 숙종에 대한 이야기는 군영에서 오래도록 전설처럼 남아 있기까지 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정권이 아무리 변해도 군영(軍營)에 남아 있던 그들, 군사들의 충성심은 한결같다. 아니 한결같아야만 한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충성’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향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