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조심태, 이유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담당했다

화성 성역소 좌목(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은 목록). (자료=화성성역의궤 권수)
화성 성역소 좌목(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은 목록). (자료=화성성역의궤 권수)

조선시대에 나라의 큰 공사가 있으면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두어 공사를 추진했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길 때 공사를 전담할 기구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두어 일을 전담케 했다. 

건축공사 뿐 아니었다. 왕의 능을 만들 때에는 산릉도감을 두었고, 왕실의 혼례가 있을 때에는 가례도감을 두는 등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도감을 두어 일을 주관토록 했다. 도감이 설치되면 고위관료가 최고책임자로 임명됐다. 최고 책임자의 직함을 제조 또는 도제조라고 했는데 사업본부의 총괄본부장과 같은 역할이다. 

여기에는 격이 조금 낮은 공사인 경우 6조의 판서가 임명되지만 중요한 공사라면 영의정이 임명됐다. 영의정이 임명될 경우 공사에 필요한 제반 행정지원을 각부 판서에게 요청하게 됨으로써 공사를 수월하게 추진하고자 함이었다. 도감을 설치하지 않은 경우에도 최고 책임자를 고위관료로 임명하는 것은 행정조직의 원활한 협조아래 순조롭게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72-2, 화성성역소 조직 계통도. (자료=화성성역의궤 내용정리)
72-2, 화성성역소 조직 계통도. (자료=화성성역의궤 내용정리)

간혹 공사의 규모나 격이 낮은 경우 도감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소(所) 또는 청(廳)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화성축성 역시 전담하는 기구명칭을 성역소(城役所)라 했다. 즉 도감보다 낮은 기구로 구성한 것이다. 화성이 비록 임금으로서는 다른 어떤 공사보다도 의미가 큰 것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지방도시의 성곽공사였기 때문이었다. 외형상으로 지나치게 격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정조는 1793년(정조17) 수원부의 명칭을 화성유수부로 개칭했다. 축성공사는 화성성역이라 불렀고 공사본부의 명칭 또한 화성성역소가 됐다. 최고 책임자는 당상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화성성역소의 최고 책임자는 총리대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총리대신은 영중추부사 겸 좌의정으로 있던 채제공이 임명됐다. 

화성성역은 격은 비록 성역소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중앙의 최고관료를 책임자로 내세워 공사의 격을 높인 가운데 진행됐다. 총리대신 아래 실제 공사를 전담할 책임자로는 감동당상을 두었다. 당시 화성유수 조심태가 임명됐다. 조심태는 1789년 수원부사로 부임하여 현륭원 조성과 수원신읍 건설을 담당한 장본인이었다. 

당시 관청이 주관한 직영공사에서는 공사의 기획과 자금 조달, 인부나 기술자의 동원과 자재 조달 등 모든 일을 관이 직접 주관해야 했다. 공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감독조직이 필요했다. 당시까지 없었던 패장이라는 직책이 도입됐다. 패장은 기술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장인들을 직접 다스려 시공의 정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담당했다.

화성건설의 추진체계를 살펴보면 총책임자로는 총리대신이 있고, 그 아래 실제로 현장에서 공사 책임을 맡은 감동당상(監董堂上)과 그 아래 도청(都廳), 책응도청(策應都廳)이 있다. 도청은 공사전반의 실무를 맡고, 감동은 기술적인 제반문제를 담당했는데 감동은 전직 관료를 임시로 채용한 별감동과 별간역이 있었다. 감동은 중요공사장에 1~2명이 배치돼 공사내용을 감독했다.

화성성역소 근무자 현황. (자료=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성역의궤) 

감동1인 밑에는 7~8명의 패장을 두었다. 성역소에는 감동 22명, 패장 182명이 명단에 올라 있다. 화성성역에 있어서 두드러진 것은 패장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패장은 감동의 휘하에서 공사장 별로 역할을 분담, 직접 일꾼을 거느리고 성역을 진행했다. 패장은 한양의 관청에서 내려온 경패장과 수원부 출신의 부패장이 담당했다. 

특이한 사항은 1789년 현륭원 조성 당시 구읍 거주자로서 보상을 받은 일부의 명단이 보이고 있다. 244명 중 19명의 하급관리 명단이 보인다. 이들 중 13인은 부패장으로 일했고, 6명은 부서리의 명단에서 보이고 있다. 부패장중 홍윤적과 나태을, 홍명룡은 하급 서리에서 패장으로 새로이 발령을 받은 경우였다. 부서리 6인은 하리 출신으로 신분의 변화는 없었다.

72-4, 1789년 구읍에서 이사 온 부패장과 부서리 현황. (자료=수원하지초록, 화성성역의궤 내용정리)
(자료=수원하지초록, 화성성역의궤 내용정리)

그리고 사무계통으로는 도청예하에 책응도청이 사무전반을 맡아 처리했다. 돈이나 자재 등의 출납을 관리하는 감관(監官)이 있다. 감관은 공사의 잡무와 회계업무 등을 보는 서리와 문서를 수발하는 서사, 물품을 지키는 고직, 서울을 오가며 업무연락을 하는 사령이 있고, 그 밖의 기수, 문서직, 사환, 포졸 등이 있다.

화성성역소의 행정적 위계는 6조 판서를 넘어서는 정1품의 관아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공사기간 중 채제공은 좌의정에서 우의정으로 승격됐다. 총리대신인 채제공은 공사기간동안 주로 서울에 머물면서 중앙의 기관을 조율하고 화성성역을 총괄했다. 

실제로 수원에 머물면서 수시로 공사 진척을 체크하고 문제점을 왕에게 보고하는 일은 감동당상이며 화성유수인 조심태가 맡았다. 그 아래 총책임은 도청인 이유경이 맡았다. 도청은 공사 진행을 일일이 감독해 열흘마다 총리대신에게 진척사항을 보고했다. 

또 패장이나 기타 감독들의 근무태도를 살펴서 감동당상에게 보고하는 일도 맡았다. 화성성역의 최고 책임자는 총리대신 채제공, 감동당상 조심태, 도청 이유경 세 사람이 담당했다. 이들은 화성성역 공사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2년 반 동안 같은 직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은 셈이다. 조심태와 이유경은 화성축성을 위해 공사기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노심초사 공사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자취를 화성성역의궤에서 읽을 수 있다. 정조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마음을 쓴 흔적이 보인다. 

조심태에게는 공사도중 한 품계를 올려 주기도 했고, 이유경에게는 갑옷 한 벌을 특별히 하사하기도 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총리대신 채제공과 감동당상 조심태, 도청 이유경은 역사에 길이 남을 화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화성건설은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명제와 성과급제가 도입돼 공사기간을 7년이나 앞당기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1993년 민족건축미학연구회는 ‘18세기 신도시 20세기 신도시’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의 발간목적은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택 200만호 주택건립 사업을 목도하면서 추진됐다.

민족건축미학연구회 소속 학자들은 18세기에 만든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비교해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책을 편찬했다. 18세기 신도시 수원화성은 세기의 걸작을 남겼는데 20세기 5대 신도시(분당, 일산, 평촌, 산본, 평촌)는 졸속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 개탄을 안할 수 없게 한다.
 
수원화성은 당시 최고의 정점인 정조의 관심으로 추진됐다. 그리고 당대 최고 관료인 번암 채제공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해 조선의 역량을 총동원했다. 화성은 성역소의 관리직 376명과 장인 1821명이 34개월 동안 이뤄낸 대역사였다. 

조선 후기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낸 화성성역 참여자 2197명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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