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77)] 수원화성은 천주교도들이 피 흘린 순교성지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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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77)] 수원화성은 천주교도들이 피 흘린 순교성지이다(2)
  • 김충영 논설위원
  • 승인 2022.06.27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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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화성행궁과 이아 모습. 왼쪽은 화성행궁, 오른쪽 하단이 판관이 근무하던 이아(貳衙) 이다. (자료=화성박물관) 
화성행궁과 이아 모습. 왼쪽은 화성행궁, 오른쪽 하단이 판관이 근무하던 이아(貳衙) 이다. (자료=화성박물관) 

수원지역에서는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다. 이는 화성건설과 관련이 있었다. 1789년 현륭원이 조성되고 신읍이 건설되자 조정에서는 수원에 성곽을 축조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정조는 화성건설에 앞서 1793년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했다. 화성건설이 완료되자 인근의 5읍(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을 화성유수부의 속읍으로 귀속시켰다. 

총융청(摠戎廳) 산하의 중영(中營)은 장용외영(壯勇外營)으로 개편했다. 장용영은 정조 사후 총리영(總理營)으로 개편돼 화성유수가 총리사를 겸하는 중군체계를 유지했다. 화성유수부는 유수 예하에 판관(判官)과 중군(中軍)을 두고 유수부와 속읍에 대한 행정, 군사, 민사, 사법 사무일체를 총괄했다. 

신유박해가 끝난 후 10년 쯤 지난 1811년 3월 당시 화성 유수 박윤수는 ‘천주교 신자들이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은 장계(狀啓)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에 근거해 다시 팔도(八道)와 삼도(三都, 즉 4都중 수원을 제외한 강화, 개성, 광주유수부)에 천주교 신자의 적발에 유념할 것을 명했다.

수원은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였으므로 ‘충·효·열(忠孝㤠)’를 강조하는 고장이었다. 천주교는 성리학과 거리가 먼 패륜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어느 지역보다 팽배했다. 그리하여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수원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됐음에도 불구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강력하게 실시됨으로써, 1817년 샘골에 살던 천주교인 이용빈이 친척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듯이 수원 지방에서 천주교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전국적인 박해가 있던 신유박해, 기해박해 때까지 수원지방 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기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수원에서 본격적인 박해는 1866년(고종3) 봄 병인년에 시작됐다. 이 사건의 원인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서 비롯됐다.

러시아는 북경조약(1860년 아편전쟁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맺은 조약)으로 연해주를 획득했다. 1864년(고종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자 당시 천주교도들은 대원군에게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다블뤼주교와 베르뇌주교가 한 달 뒤 서울에 돌아옴에 따라 무책임한 주선의 비난을 받게 됐다. 천주교를 서학, 사학(邪學)이라고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에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대비(신정황후)이하 정부 대관들이 천주교도들의 책동을 비난했고 대원군은 천주교도 탄압을 결심한다.

1866년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국내 신도 8000명이 학살됐다. 이때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는 탈출에 성공, 천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고 외규장각을 약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미 함대 침입사건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배후로 천주교를 지목하고 더욱 강력하게 천주교를 탄압했다. 당시 화성유수부의 최고책임자는 정2품의 유수로 관직제상으로는 지방관이지만 경관(京官)직에 속해 주로 비변사에서 근무했다. 

유수부의 실제 행정책임은 종5품직인 판관이 수행했다. 그리고 군사업무와 치안업무는 유수가 총리사(摠理使)를 겸하고 있어서 예하에 중군의 총리종사관이 관할했다. 병인박해 당시 화성유수는 조헌영, 이경하, 이재원, 신석희 등이었다. 

판관은 유승근, 정기명, 정광시로 유수를 대리해서 판관이 천주교 신자들을 1차적으로 신문하고 재판한 관리라면, 중군은 판관이 넘겨준 신자들을 신문해 재판하고, 상부의 재가를 얻어 사형을 집행하기도 하고 포도청의 요청이 있을 경우 서울로 이송시키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도 판관 정기명은 유수 이경하에 못지않게 천주교 신자들의 원성을 샀던 악랄한 박해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탐문 수색하고 이에 근거해 1차 심문을 담당했던 판관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 1869년 5월 23일 장안문 밖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한 지다두가 소유했던 안중(지금의 평택시 현덕면 인광리와 황산리 일대) 소재 사방 십여 리의 전답을 비롯한 전 재산을 적몰한다는 명목으로 착복했다. 지다두 순교자 가문의 후손들이 이 사실을 가전(家傳)기록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뎡리의궤 팔달문 부근 모습. 팔달문, 남암문, 동남각루, 형옥의 모습이 보인다. 병인박해때 천주교신자들을 가둔 감옥이다. 동남각루에서 참수형을 집행한 뒤 몸은 성 밖으로 던지고, 목은 남암문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자료=화성박물관)
뎡리의궤 팔달문 부근 모습. 팔달문, 남암문, 동남각루, 형옥의 모습이 보인다. 병인박해때 천주교신자들을 가둔 감옥이다. 동남각루에서 참수형을 집행한 뒤 몸은 성 밖으로 던지고, 목은 남암문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자료=화성박물관)

한편 중군은 총리영의 책임자인 총리사(화성유수)로서 군사업무와 치안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중군은 토포영으로서 화성유수부와 속읍(屬邑- 시흥, 과천, 안산, 진위, 용인)에서 발생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단속과 심문, 재판, 처벌 등을 포괄적으로 담당했다.

화성유수부는 유수를 대리한 판관과 중군의 권한이 막강했다. 속읍은 물론이고 충청도 내포지방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향을 미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수원으로 끌고 와서는 1차적으로는 판관의 근무처인 이아(貳衙, 화청관)에서 심문했으며, 1차 심문을 거친 신도들은 중군이 관장하는 중영에서 형벌을 가하거나 형옥에 가두고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수원순교자의 거주지 및 순교연도별 일람표. (자료=원재연의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논문중에서 참조)
 (자료 참조=원재연의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논문)

병인박해 때 수원지방 순교기록을 살펴보면 1865년 이전에 1명이 순교했고, 1866년부터 1874년까지 77명이 순교해 수원 지방에서는 모두 78명이 순교했다. 이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순교한 이들은 전체 순교자의 69.2%(54명)에 달했다. 이 시기가 이경하 유수와 유승근, 정기영 판관의 재임기간동안이었다.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들은 악랄하게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재산까지 빼앗아 착복하기도 했다. 순교자들의 체포직전 주거지는 화성 유수부내가 16명으로 20.5%, 속읍인 진위와 용인에서 4명으로 5.1%, 경기도 양지, 이천, 죽산, 인천 등에서 25명으로 32.1%, 충청도 내포에서 32명으로 41%를 보이고 있다. 

전체 순교자중 관외 거주자가 62명으로 79.5%에 달해 수원거주자보다 4배 정도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화성유수부의 행정구역이 평택시 안중지역까지였기 때문이다. 충청도 내포 지방은 인접 고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박해가 느슨한 곳으로 피신한 천주교인을 화성유수부에서 체포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료참조=원재연의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논문)
(자료참조=원재연의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논문)

다음으로 순교 형태를 살펴보면 78명중 44명(56.4%)만이 순교형태가 파악됐고 34명(43.6%)은 처형방식을 알 수 없다. 처형방식을 알 수 있는 교수형(올가미형)인 경우 32명으로 전체 순교자의 41%에 해당되었는데 교수형은 대개 비공개적으로 이뤄졌다. 

그 다음으로는 장살형(杖殺刑,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형)이 6명으로 7.7%였다. 옥사(獄死)는 3명으로 3.8%, 참수형이 2명으로 2.6%였다. 백지사(白紙死)는 1명만 파악됐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박해를 당했다.

윤한흠 선생이 그린 종로와 중영 그림. 1923년 수원군 남창리 103번지에서 태어난 윤한흠 선생은 1890년대 태어난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수원의 사라진 옛 모습 22점을 그려 되살아난 수원의 옛모습의 그림전시회를 가졌다. (자료=수원시)
윤한흠 선생이 그린 종로와 중영 그림. 1923년 수원군 남창리 103번지에서 태어난 윤한흠 선생은 1890년대 태어난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수원의 사라진 옛 모습 22점을 그려 되살아난 수원의 옛모습의 그림전시회를 가졌다. (자료=수원시)

화성유수부의 천주교 박해 현장은 판관의 근무처인 이아에서 1차 심문을 했고, 천주교를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은 중군의 군영 겸 토포영인 중영에서 2차 심문을 했다. 이곳에서 주리틀기와 난장질 등으로 고문을 받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수형인 경우 중영 내에 있는 미루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물에 젖은 백지를 여러 장 신자들의 얼굴에 덮어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1800년대 말에 태어난 분들의 고증에 의하면 선경도서관 자리가 사형장이었고 동남각루에서 형을 집행하고 머리를 남암문에 걸었다고 한다.

수원은 화성건설로 인해 유수부로 승격됐고 높아진 지위만큼 천주교 박해에도 책임이 지워져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 숫자는 정부 기록에서는 전무했으나 그나마 천주교 관련기록이 있어 확인이 가능한 것이었다. 천주교 측은 실제 순교자는 이 숫자의 몇 배는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수원화성은 선조들의 흘린피로 순교성지가 됐다.

아무튼 새로운 신앙이 이 땅에 들어와 정착되는 과정에서 흘린 피가 있어서 후손들이 자유롭게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필자 주석 : 본 내용 일부는 교회사학 제2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05, 원재연의 수원유수부내 천주교 박해의 전개과정 논문중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