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단법인 화성연구회는 수원의 역사, 수원의 문화재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 회원 10~20명이 모여 수원의 비지정문화재나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근대 유산을 찾아다니며 보존상태를 확인하고 시정해야 할 부분들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지금까지 50곳 넘는 수원시내 곳곳 현장을 찾아 다녔다.

이 중간 결과물들은 지난 9월16일~17일 화성행궁 광장에서 열린 ‘2022 문화재지킴이 전국대회’에서 전시됐다. 반응이 좋아 순회전시까지 계획했으나 갑자기 쏟아진 비로 인해 모두 젖어 버리는 바람에 폐기됐다. 하지만 원본은 저장돼 있으니까 전시예산만 마련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일요일인 23일엔 광교산 창성사지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고려시대 광교산에는 89개의 절집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엔 창성사·서봉사·광교사가, 전설에는 미학절터(미학사, 또는 미약사)와 지네절터 등이 등장하지만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창성사와 서봉사다. 행정구역상 창성사는 수원이고 서봉사는 용인인데 이 두 절집은 모두 국사(國師)가 머물던 곳이다.

2016년 창성사지 발굴사진. (사진=수원화성박물관)
2016년 창성사지 발굴사진.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쪽의 창성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주석했던 절이다.

진각국사 천희(千熙)는 고려 충렬왕 33년(1307)에 출생해 13세에 화엄종 반룡사에 들어가 일비대사에게서 삭발했다. 19세에 상품선(上品選)에 오르고 20여 개 절의 주지를 거쳤다. 부석사 주지일 때는 무량수전 등을 보수했는데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도 그가 주지였을 때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도 갔다가 왔으며 공민왕으로부터 국사로 임명받고 인장과 법의를 하사 받았다. 진각국사는 우왕 11년(1385) 입적했으니 속세의 나이로 76세, 법랍은 63이었다.

창성사지는 고도 344미터 광교산 중턱에 있다. 주소는 장안구 상광교동 산41번지, 13번 버스 종점 등산로 안내소에서 폭포식당 옆 개울을 건너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3년 만에 다시 창성사지로 가는 길은 험했다. 지난 여름 폭우로 등산길 곳곳이 깊게 파이고 거친 돌들이 무더기로 돌출돼 걷기가 쉽지 않았다. 회원들끼리 서로 독려하며 천천히 가는데도 처지는 이들이 생겼다.

마지막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절터 축대가 보인다.

창성사지의 금당(金堂) 등 건물은 모두 사라졌으나 축대와 건물기단, 석탑 일부, 주춧돌, 샘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절터의 남동쪽 산기슭에는 창성사 진각국사비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비석 하단부 석재와 일제시대의 비석도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비석은 1965년 매향동 방화수류정 옆으로 옮겨져 보물14호로 지정됐다.

창성사지 안내판도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창성사지 안내판도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축대고 건물터 할 것 없이 모두 무성한 잡초로 덮여 있는 것이다. 창성사의 중심건물이었던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아예 나무까지 자라나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숲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아야 장대석이 눈에 띄고 ‘아, 이곳에 건물이 있었구나’ 알 수 있을 정도다.

나무숲으로 변한 창성사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장대석 등 창성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나무숲으로 변한 창성사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장대석 등 창성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일행 중 관련된 일을 했던 이가 탄식한다.

“하아, 3년 전 발굴 작업이 중지된 지 3년 만에 다시 와보니 이 꼴이 됐네요”

나도 3년 전까지는 이곳을 자주 방문했었다. 이 절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참 좋았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화엄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청맹의 눈으로도 참선 공부를 하기 좋은 터임을 알 수 있었다. 왜 진각국사가 여기를 입적처로 삼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저 멀리 아파트단지도 그 화엄세계에 속해있지만.

‘발굴단이 조심조심 파헤쳐 간/흙 속에는 돌멩이들 속에는/기와 조각도/깨진 사기그릇도/잠자러 들어간 애벌레들도 있지만//잠에서 아우웅 기지개 하며 깨어난/천 년 전의 바람과/그때 그 가을 햇살도 보였다//푸스스 머리칼 털며 고개 든/생각도 나와 눈을 맞췄다//그러므로 내가 눈을 떴다/감았다/다시 천 년 전의 가을이었다’ - 김우영 시 ‘출토, 창성사지’

지난 2015년 창성사 발굴조사가 한참이던 때 가을 이곳을 방문하고 쓴 필자의 시다.

풀과 나무로 뒤덮인 창성사터를 바라보는 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김우영 필자)
풀과 나무로 뒤덮인 창성사터를 바라보는 화성연구회 회원들. (사진=김우영 필자)

해도 너무했다.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몇 년 전 일부의 반발로 발굴조사가 중단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했다. 위대한 자연의 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놓아두고만 있었으니.

고려시대 사찰 창성사는 국가적으로도 위계가 높았던 사찰이었고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 유적이다.

진각국사 천희의 입적사찰로서 자복사로 선정될 정도의 규모와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크기에 1986년 4월 8일 수원시의 향토유적 제4호 '창성사지'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5월 29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25호 '수원 창성사지'로 승격된 것이다.

부탁한다. 나무가 더 자라서 뿌리가 유구를 훼손하기 전에, 가시덩굴이 축대에 깊숙이 자리 잡기 전에 서둘러 정비를 해야 한다. 수원시의회도 발굴보존 예산 확보에 적극 나서주길 바란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