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산책길은 수원천이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물빛도 한층 깊어졌다.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이란 시를 가만히 읊조려본다.

이 시는 중국 북송시대 학자 정이천을 칭송한 것이다. 그는 가을의 냇물처럼 맑고 깨끗한 인품과 학덕을 가졌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잘 알려져 있는데 내 나름대로의 해석은 ‘문인이나 학자, 언론인의 글은 추수(秋水)처럼 차고 맑아 사욕이 없어야 한다’이다. 맑은 물을 볼 때마다 혼탁한 내 마음과 글을 반성한다.

수원천 산책 중 만난 잉어 떼. (사진=김우영 필자)
수원천 산책 중 만난 잉어 떼. (사진=김우영 필자)

차가운 냇물 속에는 커다란 잉어들과 치어들이 모여 있다. 곧 닥칠 겨울에 대비해 체력을 아끼려는 듯 큰 움직임이 없다. 그래 너희들도 올겨울을 잘 버텨내거라. 내년 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그런데 어느 순간 발길은 수원천을 벗어났다. 화홍문을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용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따듯한 날씨에 용연 주변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하다. 인근 소풍용품점에서 빌려온 돗자리며, 예쁜 테이블, 각종 장식품으로 멋을 내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젊음은 참 보기 좋다.

그 옆에서는 내 멋대로 ‘은행잎 예술가’라고 이름 지은 이가 낙엽을 모아 하트며, 별, 반달 등의 형상을 만들고 있다. 요즘 거의 매일 오후에 여기에 나와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말을 건네 봤다. 행궁동에 살며 동네에서 아내가 속옷가게를 하고 있단다. 나이가 나와 동갑이어서 주먹악수를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양평 등지 가을축제에 초청받아 낙엽으로 작품을 만들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말끝에 한번 갈 때마다 100만원씩 받는다는 자랑도 슬쩍 끼워 넣었다.

‘관람객’들의 반응도 좋다. 보는 사람마다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은행잎 예술가’가 만들고 있는 낙엽 작품. (사진=김우영 필자)
‘은행잎 예술가’가 만들고 있는 낙엽 작품. (사진=김우영 필자)
동공원에 펼쳐진 억새꽃의 향연. (사진=김우영 필자)
동공원에 펼쳐진 억새꽃의 향연. (사진=김우영 필자)

요즘 나의 산책 발길은 대부분 동북공심돈과 용연 사이 성 밖 동공원으로 향한다.

눈부신 억새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가을이 길어서 이곳으로 오는 날이 더 많아졌다.

동공원을 한참동안 거닐다가 다시 화홍문 쪽으로 돌아와 화서문을 목적지로 하고 산책을 계속했다. 화창한 가을 날씨 덕분에 국내외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성곽을 걷고 있다. 내가 수원과 화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맞나보다. 내 가게를 찾아 물건을 산 손님 보듯 기분이 좋다. 수원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

오래 걸었더니 목이 마르다. 행궁동 단골 호프집에 들러 생맥주 두어 잔을 마시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이 참에 조금 더 걷자. 어, 그런데 공방거리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보통솜씨가 아니어서 발걸음을 재촉하니 화성사업소 옆 공터에서 색소폰·팬플룻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맥주탓에 소변이 마려운데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을 정도다. 공짜로 듣는 게 미안해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열심히 박수를 쳐줬다. 급하게 화장실에 다녀오니 이번엔 젊은 랩퍼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흥겹다. 나도 호응을 해줬다. 오늘 횡재한 기분이다.

행궁동 공방거리에서 열린 공연. (사진=김우영 필자)
행궁동 공방거리에서 열린 공연. (사진=김우영 필자)

행복한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느님, 이 긴 가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말했다.

이 따듯한 가을이 계속되면서 코로나19로 벼랑 끝에 놓였던 상인들의 매출이 늘어나고 시민과 관광객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 아닐까?

그러니 이 계절이 다가기 전 마음껏 즐겨야겠다. 오늘은 팔달산의 가을을 만나러 가볼까?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