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의 권법총도(拳法總圖)의 그림이다. 중국의 권법이 조선에 보급돼 새롭게 정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탐마세를 시작으로 하여 갑과 을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맞대고 교전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총도(拳法總圖)의 그림이다. 중국의 권법이 조선에 보급돼 새롭게 정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탐마세를 시작으로 하여 갑과 을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맞대고 교전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 초학입예지문(初學入藝之門)이라!

 무예에 대한 로망은 강렬하다. 주먹질 한 번에 사람이 날아가고, 발차기 한 번으로 기둥을 부숴버리는 상상. 그 상상은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겨우 100미터도 달리지 않았는데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일상에서는 무릎높이 이상 발을 드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이 현대인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무예를 체조처럼 일상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권법은 마치 체조처럼 군영에서 훈련되었다. 맨손무예인 권법은 모든 무예를 익힐 때 기본이 되는 신체훈련법이었다. 그런 이유로 권법을 ‘초학입예지문(初學入藝之門)’이라고 생각했다. 즉, 초심자가 무예를 익히기 위한 관문과 같은 몸쓰기의 기본을 만드는 과정이 맨손무예에 담긴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일단 자신의 몸을 알아야 칼을 잡든, 도끼를 잡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무턱대고 무겁고 날카로운 무기에 집착하면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쓸모없는 몸짓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다지고 이해하며, 마음을 채우고 다스리는 행위가 무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 남기위한 인간만의 야성(野性), 그 야성을 바탕으로 가장 과학적이고 실전적인 지성(智性)의 상징체로 탄생한 것이 바로 무예다. 거기에 내 몸과 마음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면 영성(靈性)의 단계까지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예를 인간의 독특한 ‘몸 문화’로 보는 것이다.

 조선후기 군사들이 익힌 권법을 살펴보면 무예의 문화사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태권도를 통해 무예문화를 연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태권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보급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과정자체가 지금 한국의 무예문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권법은 중국의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를 비롯한 몇 가지 책에 그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당시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했다기보다는 신체 문화적 차이로 인해 조선화된 권법의 모습으로 수록되었다. 

 권법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첫째, 조선후기 군영에 보급된 권법은 중국의 맨손무예인 권법을 그대로 연결지어 만들어낸 보(譜)의 형태로 보급되었다. 이는 『기효신서』를 비롯한 당대 권법 수련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조선군의 권법 시험과 평가에 활용할 수 있도록 토착화의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배경이 되었다. 

 둘째, 조선군이 권법을 군사들에게 익히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병기를 보다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신체훈련의 기준으로 채택한 것이다. 권법에서 주먹을 지르는 동작을 높이에 따라 상평(上平), 중평(中平), 하평(下平) 등으로 나누는데, 이것이 창법(槍法)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권법의 자세 중 고사평세(高四平勢)이나 중사평세(中四平勢)의 움직임이 장창(長槍)의 찌르기 높이 중 상평창, 중평창, 하평창 등에 그대로 적용이 가능했다. 장창의 지남침세(指南針勢)의 경우는 상평(上平)으로 볼 수 있으며, 십면매복세(十面埋伏勢)의 경우는 하평창법(下平鎗法) 수련과 연관지어 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낭선(狼筅)이나 당파(鐺鈀)와 같은 특수 무기의 경우는 그 무게와 길이로 인해 기본적인 체력 훈련 및 유연성 강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권법 수련은 군사들의 일반적인 ‘몸’을 무예하는 ‘몸’으로 전환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련방법이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예도보통지』 권법의 핵심 기법은 강력한 타격력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족을 원활하게 사용 위한 일종의 도수체조의 성격이 주를 이뤘다. 대표적으로 양손으로 무기를 활용할 때 바탕이 되는 뒷손과 공격의 방향을 정해주는 앞손의 위치와 형태를 소위 ‘음양수(陰陽手)’라 부르는데, 이것은 무기술을 익히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에 해당한다. 권법은 음양수의 기본을 익히는 가장 효과적인 훈련법이기도 했다. 발기술보다는 손기술 중심의 동작이 주로 많았으며, 이는 창이나 도검 등과 같은 무기술 연마시 권법의 자세가 그대로 활용될 수 있었다.

 또한 권법에서 자세를 앉듯이 완전히 낮춰 손이나 발로 적을 공격하는 형태인 매복세(埋伏勢)나 복호세(伏虎勢)의 경우는 등패(籐牌)의 매복세(埋伏勢)나 저평세(低平勢)의 신체 움직임과 거의 유사하다. 이러한 권법을 통한 무기활용 능력 강화 때문에 관무재에서도 권법수(拳法手)라는 살수(殺手)시험 과목에 권법 뿐만 아니라 편곤(鞭棍)ㆍ협도(挾刀)ㆍ곤방(棍棒)ㆍ죽장창(竹長槍) 등을 함께 시험 본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권법의 보급은 명나라에서 보급된 다양한 단병접전용 무기술의 활용범위를 보다 넓게 하였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연속된 투로 형태에서 두 사람이 서로 몸과 몸을 맞대고 합을 맞춰 연습하는 교전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보다 실전적인 움직임으로 변화해 갔다. 특히 단순한 타격기 뿐만 아니라 근접거리에서 상대의 관절을 꺾거나 제압하는 유술기의 형태까지 추가되면서 권법의 활용성은 보다 확대되었다. 

 또한 ‘권법에는 정해진 세(勢)가 있는데, 실전에서는 정해진 세(勢)가 없다.’라는 말처럼 권법훈련을 통해 무기술을 비롯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세(勢)’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이는 훈련을 위하여 정해진 ‘자세’는 있지만, 그것을 실전에 사용할 때에는 ‘자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실전에서는 훈련을 바탕으로 다양한 변화를 상황에 따라 변용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전에서는 태권도의 ‘고려’나 ‘금강’ 품세로 누군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여러 동작을 활용하여 임기응변적으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후기 권법 정착의 가장 독특한 특성은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권법을 보급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무예전파 방식이자 정착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권법은 보다 빠르게 군사들을 통해 안착할 수 있었으며, 관무재(觀武才)나 시취(試取) 등 각종 군사시험의 과목으로 지정되어 안정적으로 수련될 수 있었다.

- 권법의 문화적 변용은 아이들의 놀이부터

 비록 중국의 권법이 조선 군사들에게 보급되었지만, 자연스럽게 조선화되면서 또 다른 신체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무예의 변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무예를 ‘문화’의 일부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와 조선의 기층문화가 다르면, 똑같은 권법이 조선에 보급되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화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임진왜란 중 조선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에서는 무예의 문화적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무릇 우리나라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만 중국인은 젓가락을 사용하니 중국인으로 하여금 숟가락을 사용하도록 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사용하도록 시험하면 각각 생소한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검과 창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궁시(弓矢)는 비록 우리나라의 장기(長技)지만 어찌 그 하나만을 익히고 다른 무예를 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처럼 무예문화의 변화에 대한 생소함을 ‘젓가락과 숟가락’이라는 식문화로 비유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군은 보다 빠르게 중국의 권법을 군영에 도입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중국의 몸짓이 쉽게 퍼져나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바로 아이들의 놀이로 권법을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권법을 보급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방법들이 모색되었는지 살짝 엿볼 수 있다. ‘권법(拳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인데,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마을의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힐 아동을 뽑아서 종전대로 이중군(李中軍)에게 전습 받게 할 것을 훈련도감에 이르라 하였다. 인하여 『기효신서』 가운데 곤방과 권법에 관한 두 그림에 표시를 하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법을 훈련도감에 보이라고 하였다.’라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적 확산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문화저변에 녹아들어야만 가능하기에 아이들의 놀이로 권법을 풀어낸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중국의 몸짓은 재미있는 놀이가 되어 조선 아이들의 몸에 맞게 새롭게 변형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조선의 권법이 골목길을 따라 퍼져나간 것이다.

 무예는 몸을 다스려 마음을 채우는 몸짓이다. 단단하고 질긴 인대와 근육, 그리고 뼈를 만들어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 몸 안에서 담력과 자존감을 채우게 된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아름다운 생각도 건강한 몸을 통해 구현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다. 

 그 바탕에 맨손무예인 권법이 자리잡고 있다. 무거운 무기의 무게를 내 두 손으로 견딜 수 있는 지구력과 날카로운 적의 무기를 빠르게 방어하는 순발력은 권법을 통해 안정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예는 몸을 살피며 지루함을 즐기는 방식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지루하고 모진 세상살이를 견디는 힘이 무예 수련에 담겨 있다. 그래서 무예를 즐기듯 재미있게 배워나가면 인생도 즐거워진다. 그것이 필자가 무예를 오래도록 수련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건강 또한 마찬가지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병들고 지쳤을 때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내 몸에 꼭 필요한 몸짓을 무예를 통해서 얻어 가면 또 다른 몸 세상이 그려질 것이다. 

 

* 그동안 <최형국의 ‘칼잽이 칼럼’>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몸을 살필 시간이 되어 잠시 글을 쉬어 갑니다. 다음에는 더 기(氣) 차고, 풍성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무예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책으로 만나고 싶으시다면 졸저인 <무예 인문학>, <정역 무예도보통지-정조, 무예와 통하다> 등을 추천 드립니다.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입니다.  늘 몸 건강, 마음 건강하시길 두 손 꼭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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