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선조25년) 초기 연안(延安)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장 이정암(李廷馣).1541-1600)은 사대부 출신의 지장(智將)이다.

스무살에  문과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내외직을 두루 거친 유능한 신료였다.

예문관검열,춘추관기주관,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예조•형조•병조좌랑,승지,병조참의,연안•장단•평산•동래부사,양주목사 등이 그 주요 이력이다.

특히 임진왜란이 터지기 20년 전 연안부사로 나가 베풀었던 선정(善政)은 훗날 연안대첩을 이루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왜적의 약탈을 피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이부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다시 연안성으로 돌아와 생사(生死)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조정에서도 요직인 이조참의를 맡고 있었다.

선조가 서둘러 피난길에  오르자 이에 실망한 그는 스스로 목을 맸고, 아내는 소주 두 사발을 들이켰다. 다행히 인사불성인 상태로 친척들에게 발견돼 두 사람 다 목숨은 건졌다.

사류재(四留齋.이정암의 호)공은 뒤늦게 선조를 따랐지만, 이조참의 자리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이 때 왜적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조정이 그토록 믿었던 명장 신립(申砬)마저 이 해 6월7일 충주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왜군은 거칠 게 없었다. 두 갈래로 나눠 한쪽은 한양을 거쳐 평양성을 향했고, 다른 한쪽은 함경도로 직진했다. 조선 조정은 공황상태였고, 백성들은 통곡과 비탄 속에 갈팡질팡하다가 왜적의 칼날에 무참히 스러져갔다.

해전(海戰)에서 이순신장군이 연전연승하는 것과 달리, 육지에서는 패전의 연속이었다.

6월 하순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조정은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해서(海西•황해도)지방 또한 연안성 이외의 모든 지역이 적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이정암이 의병들과 함께 연안성에서 왜적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오랜  가뭄끝에 내린 한줄기 단비였다.

연안대첩을 시작으로 이 해 11월 진주에서 목사 김시민(金時敏)장군이 2만여 명의 왜군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다. 

이어 관북(關北•함경도)지방에서 역시 사대부 출신 의병장 정문부(鄭文孚)가 이 해 10월 하순부터 4개월여에 걸친 끈질긴 전투끝에 최정예 왜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부대를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했다.

조선 중부에서 발화된 승리의 불길이 남부로 확산되고 이어 북부까지 번져간 것이다.

이와 같이 육지에서의 큰 싸움에서도 승전보가 잇따르면서 조선군은 전열이 정비되고 사기가 올랐다. 

연안대첩이 결국 왜군에 대한 반격의 디딤돌이 된 셈이다.

황해도 초토사(招討使) 이정암이 연안성싸움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아슬아슬했던 고비도 많았다.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1만여 명은 평양성을 점령한 뒤  이 해 10월 초 예봉을 돌려 연안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백성들은 겁에 질렸다. 여론이 분분했다. 의병들도 죽기를 각오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성안에서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다.

이공의 문집인 《사류재집(四留齋集)》의 <행년일기(行年日記)>와 <행장(行狀)>에는 그때의 긴박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먼저 휘하 장수들과 참모들의 말이다.

"지금 이 극악한 적들은 일찍이 옛날에도 없었습니다. 한달도 채 안돼 한양•개성•평양 등 3개 도성을 연거푸 함락시켰습니다. 더 이상 향할 곳도 없고, 아직까지 한 사람이라도 성을 지켜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성을 지킬 수 없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군이 없고(無軍), 식량이 없고(無食), 무기가 없습니다(無機械). 이 세 가지가 없는데, 빈 손으로 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은 초토사이지, 이 성을 지키는 장수가 아닙니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다. 적전분열로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이대로 무너질 듯한 낭패감이 엄습했다.

공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경연(經筵)의 늙은 신하로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蒙塵)하던 날에 말고삐를 잡고 뒤따르지 못했다. 이제 초토의 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한 성을 의지한 채 목숨바쳐 보답해야 하거늘,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더구나 백성들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놓고 왜적이 성 밑에 와 있다고 하여 백성을 버려둔 채 떠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내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리고는 즉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성을 떠나고싶은 자는 먼저 나가라. 나는 마땅히 이 성에서 죽을 것이다. (수하들을 가리키며)너희는 지금 당장 마른 풀더미를 쌓고 횃불을 준비하라. 적병들이 성안으로 몰려들거든 즉시 내가 앉은 풀더미에 불을 지르라."

의병들과 백성들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앞다퉈 떨쳐 일어나 외쳤다.

"대장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데, 우리도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연안대첩은 이렇게 의병과 백성이 한 덩어리가 돼 싸워 이뤄낸 눈물겨운 승리였다.

일주일 동안이나 밤낮이 따로 없는 팽팽한 대치와 치열한 전투에 백성들과 의병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의병장 이정암도 지휘소에서 앉은 채로 깜박 졸았다. 먼저 간 벗 청강(淸江•李濟臣의 호)이 손으로 이공의 등짝을 치며 큰 소리로 깨웠다. "여보게 중훈(仲薰•이정암의 자), 적들이 남쪽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네. 얼른 일어나 가서 막아야 하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벌떡 일어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성벽으로 달려가 보니, 청강의 말 대로 왜병들은 벌써 성벽을 타고 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참패한 왜적들은 야반도주하며 이공에게 나무궤짝을 하나 보내면서 직접 열어보라고 했다. 궤짝이 도착하자  주위에서 모두 승리의 기쁨에 젖어 서로 먼저 열어보려고 덤볐다. 공이 이를 제지하며 "적들의 계략은 예측하기 어렵다. 함부로 열지 말고 궤짝 안을 여기저기 찔러보라"고 일렀다. 공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속에는 과연 한 자그마한 왜구가 단검을 손에 쥔 채 공을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의병장 이정암은 선조의 말대로 '불교고군(不敎孤軍•훈련도 받지 못한 외로운 군대)'을 이끌고 야차같이 사나운 왜군을 격파한 비범한 장수였다.

이 싸움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백성들은 그의 무용담에 관한 말이 나오면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듯이 입에 거품을 물며 신이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출중한 지략과 용맹을 지녀 '전장에 나가면 장수요,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出將入相)'재목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청렴강직하고 기개가 넘쳐 권세있는 자들에게 굽신거리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명종때 조정의 실력자였던 윤원형(尹元衡)의 거듭된 부름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던 그의 올곧음은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회자됐던 유명한 일화다.

그는 선조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십조차(十條箚)'란 제목으로 선조에게 올렸던 상소문이 이를 증거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열번째, '내탕(內帑•왕실금고)금을 풀어 장사(將士)들에게 나눠주라(發內帑以賚將士)'는 조목은 통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신은 전하께서 사변(임진왜란)이후 사사롭게 금은보화를 모두 왕실로 거둬들여 난리를 피할 계책을 하고 있다는 시정의 유언을 듣고 놀랍고 괴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스스로 나라를 버리고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서 길이 보전한 경우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천승(千乘)의 나라의 지존(至尊)으로 다른 나라에 조정을 의탁함이 욕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몸을 가볍게하여 필부(匹夫)가 돼 피신한다면, 백성이 눈앞에서 흩어지고 적은 뒤쫒을테니 사사로이 간직한 보화들은 오히려 일신을 거추장스럽게 할 뿐입니다...내탕금을 다 관계자에게 맡겨 여러 지방에 나누어 내려보내 전사(戰士)들을 위한 포상금으로 쓰신다면 모든 의혹이 해소되고 원근(遠近)에서 감복할 것입니다..."

연안대첩이라는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이공의 벼슬이 관찰사와 병조참판에서 끝난 것은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그의 이런 강직함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그를 이렇게 추모했다.

 "시서(詩書)를 방패삼고 인의(仁義)를 창검삼아 왜적을 크게 무찔렀음에도 공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세상 떠났을 때 집안에는 쌀 한 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 땅의 위정자들과 공직자들이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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