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동, 이른바 ‘행궁둥이’ ‘행리단길’이라고 불리는 그 골목골목을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음에도 ‘책쾌’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옆 꽃집까지는 알았어도 한발 더 그 집까지 들어 가보지 못했다. 명색이 시인이고, 언론매체에 사설과 칼럼을 쓰는 신문쟁이라면서 이 책방을 몰랐다니.

옆 골목에 얼마 전 문을 연 경기서적도 들어가 봤고 시인과 농부 앞 딱따구리 책방도 지나면서 봤다. 나혜석 그림이 있는 골목 2층엔 독립서점 브로콜리 숲도 있었는데.

책쾌 입구. (사진=김우영 필자)
책쾌 입구. (사진=김우영 필자)

며칠 전 OBS에 행궁동이 소개됐다. 아마도 여름에 촬영했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와서 반가웠다. 오랫동안 다녔던 골목집, 개그맨이었다가 역사학자가 된 정재환 박사가 운영하는 북카페 봄뫼(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 북문 농협 뒤 자수명인이 운영하는 빙수집 등이다.

거기서 책쾌가 소개됐다. 그런데 책방지기의 남편 얼굴이 낯익다. 아, 그렇구나. 얼마 전 (사)화성연구회에 입회한 한옥 목수 김석 씨였구나. 이번 송년회 끝나고 2차도 함께 갔었지.

알았으니 궁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인 월요일 곧바로 방문했다.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48번길 26-1, 지번으로는 팔달구 신풍동 139-3번지다. 아, 그런데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무란다.

며칠 지나 다시 방문했다. 눈 내리는 날 행궁동 골목을 걸으니 또 다른 낭만이 있다. 그래서 지름길을 놔두고 일부러 빙빙 돌고 돌아 화성성곽까지 갔다가 왔다.

책방 책쾌의 목제문을 열고 들어가니 편안하다. 실내도 원목으로 꾸며진 터라 나무향기가 가득했다.

책쾌 내부. (사진=김우영 필자)
책쾌 내부. (사진=김우영 필자)

책쾌는 2020년 문을 열었다. 조선의 음식, 건축, 여성을 테마로 한 전시에다 판소리 공연까지 기획했다. 이하림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책쾌가 우리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남편과 함께 마을의 사랑방처럼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이 공간을 기획했고 한옥 목수인 남편의 손길을 거쳐 책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책쾌는 단순히 책을 파는 책방에서 벗어나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를 전파하는 장소를 지향하고 있다. 지역 문화 사랑방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책쾌에서는 주로 조선시대 책을 판매한다. 둘러보니 나와 친한 김준혁 교수와 최형국 박사, 얼마 전 나와 함께 ‘수원, 역사 속의 나무’란 책을 집필한 김은경 박사의 책도 여러 권 있다.

내부는 책방과 전시장, 카페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구조다. 정조‧조선시대와 관련된 역사책들이 대부분이다. 한 수채화가의 그림도 전시되고 있다.

책쾌는 조선시대의 책 중계상이므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책으로 쾌하다, 책으로 즐겁다’라는 뜻도 있단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서적의 유통을 관리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는 “성리학적 윤리를 담은 책들은 모두 국가에서 편찬하고 출판하고 유통시켰다. 공식적으로 책을 사고파는 민간 서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 매매는 성리학에 반하는 상업 행위였다. 유학자에게 필요한 책은 국가에서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찍어 '나눠줬다'”고 밝힌다. 따라서 책장수들이 일일이 책을 가지고 이집 저집 이 동네 저 동네를 발품팔고 다니면서 팔았다. 이들이 책쾌다.

조선 후기 유명한 책쾌가 '조신선'이라고도 불린 조색이란 사람인데 사도세자를 비롯, 정약용, 박지원 등도 만났다고 한다.

1771년 여름 책쾌들이 영조에 의해 참극을 당하기도 했다. 영조는 ‘강감회찬’이라는 청나라 책을 읽은 자는 물론 유통시킨 자들을 전원 색출하라 명했다. 이 때 책쾌와 통역관 100명 가까이 잡혀왔고 이중 책쾌 두 명은 참수되어 효시됐다. 나머지도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고 수군으로 보내졌다.

책쾌를 둘러보다가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란 책을 구입했다. 정조 때의 문인 이옥과 김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다.

이옥은 경기도 남양에서 1760년에 태어나서 1815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이언’, ‘심생전’, ‘김광억전’ 등이 있다.

정조를 흔히 ‘조선르네상스’(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를 연 임금, 개혁을 외친 군주라고 평가하지만 문체에 있어서는 고집을 버리지 못했다.

정조는 서양학, 패관잡기,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했다. 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해야 한다는 문체 수구주의자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정조가 꼽은 대표적인 불순한 문장이었다. 이옥의 문장은 소설식 문체인 패사소품체였다. 과거를 봤지만 번번이 문체 때문에 급제하지 못했고 1등으로 급제한 적이 있었지만 정조는 그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의 가장 끝에 붙이도록 했다. 정조에게 밉보인 탓에 군대도 두 번이나 가야했다.

책쾌가 행궁동 지역의 대표적 문화 상징이 되길 바란다. 행궁동엔 먹고 마시는 카페나 음식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쾌 같은 문화공간이 있다고 자랑해도 될 것 같다.

참, 책쾌가 더 매력 있는 것은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책맥’이라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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