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북관(北關•함경도)대첩의 영웅 정문부(鄭文孚.1565-1624)는 하늘이 낸 장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 갈래로 벌어졌던 길고도 힘겨운 싸움에서 어찌 모두 이길 수 있었겠는가.

정문부는 원래 문관출신이다. 24세 때 문과 과거에 차석으로 급제해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정7품)을 지낸 뒤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정6품•병마절도사보좌관)로 부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이었다. 28살의 청년 관원으로 임진왜란을 맞은 셈이다. 개전 초기 함경도는 어느새 가등청정군(軍)의 세상이 돼버렸다. 그로부터 두세 달 뒤 정문부는 그 지방 수령들과 무관, 선비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 의병장에 추대됐다. 20대 초반 문과 차석을 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 조정 신료들의 과거시험이라고 할 중시(重試)에서까지 장원한 수재였다. 하지만 의병장이 되기 전까지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젊은 애송이 사대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했던 그가 의병장이 되면서 북으로는 여진(女眞)•말갈(靺鞨)을 평정해 국경을 튼튼히했고, 안으로는 회령(會寧)•경성(鏡城)•명천(明川)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叛亂)을 진압, 후방을 안정시켰다. 이어 함경도를 점령한 채 약탈을 일삼던 약 2만 명의 왜적들과 4개월 여에 걸쳐 혈전을 벌여 이들 왜구를 함경도 땅에서 모조리 쫒아냈다.

이 세 갈래의 싸움은 약간의 시차만 있을 뿐, 모두 왜적과 대치•전투 중에 벌어진 것이었다. 

이만하면 하늘이 낸 장수라는 수식어가 결코 사치스럽지 않을 것이다.

20여 년에 걸쳐 5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던 어진 재상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1602-1673)는 현종에게 정문부에 대한 신원(伸寃)과 추증을 주청(奏請)하면서 바로 이 점을 지나치지 않았다.

"병마평사 신 문부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을 토벌하여 육진 밖에서 적군의 깃발을 뽑아버렸으며, 백탑 아래에서 (왜적을)대파했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히했고 오랑캐의 기세를 꺾어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는  만력(萬曆•명나라연호)이래 선무(宣武)공신이 된 장수들 중에는 없었던 바입니다.(兵馬評事臣文孚,躬將義師,討淸正搴六鎭之外,踐血白塔之下,威服靺鞨以全邊境,挫蠻夷之氣,建震耀之勳,萬曆以來,宣武諸將之所未有也)"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된 신하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정문부가 왜적이고, 북방오랑캐고, 반란세력이고 할 것 없이, 적과 싸웠다 하면 언제나 이겼던 비결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장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듯하지만 결코 하기 어려운 정문부 특유의 자로 잰 듯한 주도면밀함과 신출귀몰한 지략이 숨겨져 있다.

이를 요약하면 대략 일곱 가지 정도다.

즉 △민신(民信.백성의 믿음) △포용과 결단 △적의 첩보망 차단 △매복•기습과 지구전(持久戰) △왜구에 공포심 조장 △기후 및 날씨 활용 △지형•지물의 이용 등이 그것이다.

정문부가 구사했던 이 같은 전략•전술의 실제 사례들을 살펴보자.

사료를 보면 하나같이 정문부는 성격이 강직하여 타협을 모르며 문무를 겸전한 인재라고 기록돼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과급제 성적(2등)이 매우 뛰어났음에도 첫 직책이 군직(軍職)인 한성부 참군이었고, 두번째 직책 또한 군직인 병마평사였다. 한성부 참군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않으나 훈련원 참군의 그것에 비춰보면 무예를 익히고 한양도성 방어 및 병법을 연구하는 게 주요 업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10대 후반에 무예를 익혔던 정문부로서는 이 시기에 무예와 병법에 어느 정도 눈을 떴을 것이다. 병마평사는 앞서 말했던 대로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군사조치에 참여하고 문서업무를 관장하며 군수물자와 인사고과, 시장개장(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정문부는 이처럼 다양하고 중요한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는 평소의 강직한 성품이 말해주듯, 얼마든지 위세를 부리고 치부(致富)할 수 있는 요직에 있었음에도 매사를 정직하고 공정하게 처리해 백성과 관원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반도(叛徒)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던 그를 보고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자신의 목숨마저 제쳐둔 채 농기구를 들고 필사적으로 덤벼들어 구해냈겠는가. 

정문부가 의병을 모은다는 소문에 깊숙히 은신해있던 지방수령과 관원, 선비, 장사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뛰쳐 나온 것은 또 예삿 일인가. 

그리고는 나이도 어리고 지위도 낮다는 이유 등으로 한사코 고사하던 그를 만장일치로 의병장 자리에 앉힌 데서도 그의 인품과 출중한 능력에 대한 그들의 돈독한 믿음이 읽혀진다.

일찍이 공자(孔子)께서 정치의 요체로 양식(足食)•군대(足兵)•백성의 신뢰(民信) 등 3가지를 꼽으면서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신뢰라고 했다. 군대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나 군사를 통솔하는 것이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우리 정치의 참담한 현실은 공자의 이와 같은 가르침이 2천5백년이 지난 지금도 불변의 진리임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런 점에서 정문부는 승리의 기반을 확실하게 구축한 것이다.

단숨에 수백명으로 늘어난 관북 의병들을 이끌고 정문부가 가장 먼저 단행한 일은 반란세력 척결이었다. 그 첫 단계로 안변(安邊)에 본진을 두고 북쪽으로 함흥(咸興)과 길주(吉州)에 각각 2천 명 전후의 왜적을 주둔시키고 있던 가등청정군과 이들의 수족노릇을 하는 북쪽 반란 세력간의 연계를 차단하는 일에 착수했다. 먼저 쌍방 사이에 활발하게 작동중인 첩보•정보 조직망을 은밀히 추적, 파악한 뒤 측근 장수인 강문우(姜文佑)와 수하 소수 기병들을 시켜 이들 첩자들을 일망타진했다. 이어 반란군 수괴인 국세필(鞠世弼)에게 북변(北邊)을 어지럽히는 오랑캐들을 함께 치자고 제의, 의병들을 이끌고 경성(鏡城)으로 들어가 국세필을 거듭 설득하며  안심시켰다. 한 달 가량 '불안한 동거'가 계속됐다. 이 사이 왜적 1백여 명이 영문도 모른 채 경성으로 다가오자 고령(高嶺)첨사 유경천(柳擎天)과 장사 강문우를 보내 왜적들을 섬멸했다. 요충지 경성을 장악한 국세필 일당은 반란세력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클 뿐 아니라 왜적과의 접촉도 제일 많았다. 관북의병들이 경성밖에서 왜적 1백여 명을 전멸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회령(會寧)땅에서 유생과 장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적 수괴인 국경인(鞠景仁)일당을 쳐죽였다. 2백여 백성들의 공격에도 끄덕없던 명천(明川)의 정말수(鄭末秀) 반당(叛黨)도 오촌(吾村)權管(종9품무관) 구황(具滉)과 강문우의 기병들에게 완전 분쇄됐다. 이에 큰 위기를 느낀 국세필 등은 수하 들을 시켜 소란을 피우게하는 등 선공의 빌미를 찾다가 도리어 이를 간파한 정문부에게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참수를 당했다. 이로써 반도들은 완전히 소탕됐고, 한때 반적들의 강요로 그들에게 부역했던 백성들이 대부분 의병으로 돌아섰다. 함경도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겠다고 달려온 백성들에 힘입어 의병수는 금새 6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정문부는 패잔병 신세로 부령(富寧) 정암산(靖巖山) 속을 헤맬 때 자신에게 활을 쏴 부상을 입혔던 반도(叛徒)를 비장(裨將.수행무관)으로 거뒀다.

이에 감격한 나머지 육진의 병사들조차 정문부 휘하 관북 의병에 속하길 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훗날 장평(長坪)전투에서 대승한 뒤 함경감사에게 미움을 받아 북방으로 밀려나 오랑캐를 평정하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정문부는 저항하는 오랑캐들을 힘으로 제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특유의 뚝심과 관용으로 그들을 달래고 감동시켜 북변을 안정시켰다. 후방이 튼튼해졌으니 이제 왜적을 몰아낼 차례였다.

길주의 장평전투에 출정하는 정문부는 과감하고 결연했다.  길주는 왜장 가토 우마노조가 거느린 왜적 2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부장인 정현룡(鄭見龍)이 "적세가 강하니 우선 경성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는 게 좋겠다."고 말리자 정문부는 "안방을 지키는 여인네를 본받으라는 것이냐?"며 다수 의견을 좇아 진격 명령을 내렸다. 얼마 뒤에 또 한 사람이 같은 이유로 길을 막자 정문부는 "네가 왜놈들을 위해 우리 군사의 앞 길을 막아서느냐?"고 일갈하며 곧바로 참수해 그 목을 깃대에 매단 채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앞서의 글에서도 기술했듯이, 물론 이 전투에서 관북의병들은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정문부 장군이  구사했던 전략•전술을 살펴보자.

10월26일(이하음력)이었다. 동관(潼關)첨사 이응성(李應星)을 유진장(留鎭將)으로 삼아 7백명의 병력으로 경성을 지키게 하고, 정문부는 중위장(中衛將) 종성(鍾城)부사 정현룡과 함께 경성이북 병력 천여 명을 이끌고 명천에 나가 진을 쳤다. 길주 목사 정희적(鄭熙績)과 수성( 輸城)찰방 최동망(崔東望)이 와서 합류했다. 길주성 안에는 왜적 1천여 명이 있었으며, 길주 남쪽 80리 떨어진 嶺東 책성(柵城)에 4백여 명이 주둔,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이들 왜적은 열 명 내지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는가 하면 병력을 넷으로 나눠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납치해가는 등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이에 정문부는  정예병 4백 명을 뽑아 이를 둘로 나눠 한 무리는 옛 역참터에 주둔시키고 또다른 무리는 요로에 매복시켰다. 좌위장(左衛將) 고령첨사 유경천은  길주군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해정(海汀.成津)에 주둔하면서 약탈하는 왜적들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우위장(右衛將) 경원(慶源)부사 오응태(吳應台)는 길주 양리(兩里)와 서북보(西北堡)토병(土兵), 본보(本堡)장졸들을 이끌고 보에 주둔하면서 정예병들을 뽑아 마을 입구에 매복시켜 나무하러 간 왜적들의 통행로를 끊게 했다. 또 종사관 원충서(元忠恕)에게 정예병 2백여 명을 줘 길주 북쪽 30리 떨어진 아간창(阿間倉)의 등산(登山)에 자리잡고 왜적의 거점을 엿보게 했다.

10월30일 이른 아침 왜적 천여 명이 깃발을 앞세우고 성을 나와  해정 가파리(加坡里)로 향했다. 원충서는 즉시 각처 복병장들에게 알리고  부하들을 통솔,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붙잡아 끌고오는 왜적들을 공격했다. 선두에 선 왜적 2명을 베자, 왜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를 추격하다 왜적의 대군과 맞닥뜨렸다. 잽싸게 복병들로 하여금 산등성이 요새를 선점토록 하고 자신은 정예병들과 함께 진지로 후퇴해 좌참(左驂)복병장 방원(坊垣)만호 한인제(韓仁濟)에게 알렸다. 한만호는 즉시 3백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와 원충서 부대와 함께 왜적과 맞섰다. 전면전이었다. 왜장 직정(直正)의 지휘 아래 천여 명의 왜적들도 죽기살기로 덤볐다. 이 때를 대비해 정문부가 요소요소에 주둔•매복시켜 놓았던 아군의 장수들이 병력을 이끌고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닥치는대로 왜적을 주살했다.

좌척후장 구황, 우척후장 안원(安原)권관 강문우, 별장 옥련(玉連)만호 안옥(安沃), 종사관 조산(造山)만호 인원침(印元枕), 군관 황사원(黃嗣元)•박은주(朴銀柱) 등이 그 용맹한 주역들이다.

견디다 못한 왜적들이 인근 장덕산(長德山)으로 도주하자 의병들은 이들을 포위한 채 10여 리를 추격하며 짓밟았다. 산 위에서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곳에 매복해 있던 우위복병장 사절동(斜卩洞) 권관 고경민(高敬民)의 복병들이 사방에서 뛰어 나와 왜적의 씨를 말렸다. 화살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져 죽은 자, 풀섶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5 시간여에 걸친 혈투 끝에 왜적들은 장수만 5명 이상을 비롯한 천여 명의 병력을 잃고 대장 직정과 호위 병력 극소수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길주 왜적은 전멸에 가까운 치명적 패배를 맛봤다. 결국 장군의 치밀한 병력 배치와 운용, 요충지 선점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과 기습 등이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요 요인이 됐다. 의병장 정문부와 관북 의병들간의 신뢰는 철옹성처럼 견고했다.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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