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강진 피해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됐다. 한국이 오후 9시니까, 튀르키예는 초저녁이겠지. 앙카라에 있는 김용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 튀르키예로 간 지 벌써 22년이나 됐다.

“김우영! 어, 나야 김용문.”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다. 방학 중이라 한국에 와 있단다. 반가운 마음에 연이틀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김용문교수(왼쪽)와 팔달문 근처에서 대포 한잔 했다.(사진=김우영 필자)
오랜만에 만난 김용문교수(왼쪽)와 팔달문 근처에서 대포 한잔 했다.(사진=김우영 필자)

김용문은 그쪽 계통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막사발' 작가다. 1955년생이니 나보다 조금 세상을 더 살았다. 김용문은 오산, 나는 화성이 고향이다. 옆 동네이기도 하고 마음이 잘 맞아 친구처럼 지낸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는 사이는 아니다. 각자의 살아온 세월과 작품세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김용문은 1982년 ‘토우전’을 시작으로 30차례 가까운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세계막사발장작가마 페스티벌'을 창설해 수원과 오산 등 국내와 중국, 일본,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해외에서 매년 열고 있다.

김용문이 천착하는 막사발은 우리 선조들이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생활그릇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막사발은 자연스러움이 담긴 그릇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찻잔으로 각광받았으며, 조선도공이 만든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井戶茶碗)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는 막사발을 등한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김용문은 묵묵히 장작가마에 불을 지펴 막사발을 만들어 왔다.

나는 김용문의 막사발을 매우 좋아한다. 지금도 물그릇, 밥·국그릇으로 사용하고 있고 투박해서 오히려 마음에 쏙 드는 작은 다완 한 개는 책상에 올려놓고 감상한다.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지금은 사라진 화성 제부도 가는 길의 폐교에 꾸민 예술촌 '쟁이골'이었다. 그 때 그의 작품을 비롯해 경기도내에서 잘 알려진 조각가, 서예가,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표정에다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눈초리, 상투처럼 틀어 올린 머리...그도 나를 아니꼽게 봤던가 보다. 밤새 꼿꼿하게 앉아 술을 마시며 기 싸움을 벌였다. 동석했던 고 김명훈 형이 “야. 니들 지금 뭐하냐?”라고 말리는 듯 했지만 사실 그도 그 상황이 재미있었던 듯하다. 자존심 세다고 소문난 두 놈이 한 밤중에 지치지도 않고 기세 싸움을 하고 있으니.

2012년 수원에서 열린 김용문 막사발전시회.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12년 수원에서 열린 김용문 막사발전시회.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그리고 친해졌다. 오산에서, 수원에서, 서울 인사동에서 수시로 만나 서로의 작품세계를 공유했고 술을 마셨다. 그는 막사발 몇 개 팔렸다고 좋아하며 앞장서서 술집으로 향했다.

오산 그의 고향집에서 1998년부터 막사발 축제를 여러 해 열었다. 매년 세계 유수 도자작가들과 함께 장작가마 쟁임작업과 장작불을 지피며 문화예술 나눔의 장을 열었다.

그러나 주변의 질시와 이해부족, 예산부족으로 접었다. 그나마 오산시에서 예산지원을 했지만 행사를 치를 때마다 빚은 늘어났다. 세계 10여 개국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 행사를 운영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났다. 대신 수원에서, 서울에서, 전북에서, 경북에서, 중국에서, 튀르키예에서 전국과 전 세계를 떠돌며 전시회와 막사발축제를 열었다.

2001년 장안공원에서 열린 세계막사발장작가마축제.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01년 장안공원에서 열린 세계막사발장작가마축제.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13년 8월 한 신문 사설에 그의 이야기를 썼다.

‘최근 막사발 작가로 유명한 도예가로서 세계막사발장작가마축제 위원장 김용문씨가 고향인 오산시를 떠났다. 아예 주민등록 주소지까지 옮겨버렸으니 아주 경기도를 떠난 것이다. 김 작가는 주지하다시피 막사발의 장인으로 현재 튀르키예 앙카라 하제테페 국립대학 교수이자 세계막사발장작가마축제 위원장이다. 매년 세계 유수 도자작가들과 함께 가마 쟁임과 장작불을 지피며 문화예술 나눔의 장을 열고 있다. 그런 김 작가가 지난해 태어나고 자란 오산시를 등지고 완주로 이전해 세계 막사발 축제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용문 작가는 왜 경기도를 떠나 낯선 곳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작품 활동과,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 전통 막사발의 세계화를 위한 세계막사발장작가마축제의 지속적인 개최를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경기도에서는 그의 이런 포부를 잘 알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한국마저 떠났다.

2010년 9월부터 지금까지 튀르키예 앙카라 하제테페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막사발을 알리고 있다. 외길로 살아오면서 창작에만 천착해온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개성이 강하다. 품에 안기가 쉽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는 그를 안았다.

그는 이달 말 튀르키예로 돌아간다. 나도 그가 사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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