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소설’ 관련 에피소드 Ⅱ. 작은 아파트 단지의 정문을 막 지나려 할 때, 길 앞 10m 이내 가운데 지점에 한 중형 SUV가 앞문이 활짝 열려진 채 서있고 30대 부부가 물건을 싣고 정리하고 있었다. 그 차 오른쪽은 물론 왼쪽으로도 진행할 수가 없어 정거한 채 기다렸으나, 부부의 행동은 한참 그대로 이어졌다. 상황을 짐짓 외면하는 듯해 짜증이 솟았다. “누구나 삼가야 할 자리에 버젓이 정거하고서도 이렇게 시간을 끌다니, 아니 지나가야 할 차가 있건 없건 저곳에서 저러면 되나”고 불평하고, “내가 만약 경적을 울린다면 저 사람들의 행태로 보아 오히려 불쾌해 하며, ‘당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서, ‘조금만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비켜줄 텐데 뭘 그리 시끄럽게 경적까지 울리느냐’며 대들지 몰라. 그러면 나는 저들을 적반하장(賊反荷杖) 취지로 비난할 것이고, 그러면 저들이 거친 말로 응수해서, 서로 폭언을 하고 폭행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경찰이 출동하고. 그러면 격분이고 뭐고 대번 후회할 테지. 아휴, 속 끓지만 아무래도 그저 참아야겠구만” 하였다. 그러자 마누라가 거리가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고 소설 쓰고 있네요.” 나의 재미없는 상상을 떠나 소설의 ‘상상’을 싸잡아 무슨 쓸데없는 불합리한 비현실성 추정으로 여기는 의식이 비껴 있다고 여기고 또 앙앙불락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언급이 예상 이상으로 잦다. 그런 언급에서 소설은 소설만이 아니라 모든 허구물을 대표하는 제유(提喩)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불평의 시선을 뒤로 돌려보니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개연성이 정도 이상으로 부족하거나 결핍된 허구물들이 꽤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쉽게 만나 쉽게 사랑에 빠지며, 양해가 가능한 단순한 문제를 갈등으로 부각해 억지 긴장을 야기하고, 그 해소도 우연으로 시도되며, 출생의 비밀을 포함해 등장인물들이 혈연이나 과장된 은원으로 얽혀있고. ‘우리를 바보로 아나. 저런 이야기를 어떻게 저렇게 진지하고 지루하게 이어가나’는 비난이 시위처럼 들린다. 그래서 우리의 일부가 그 실망에 관련된 주변의 상상을 풍자하려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그만 ‘소설’을 차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구가 진실을 담지하려면, 특히 사건들을 생성하고 연결하는 상상의 조력이 있어야 하고, 상상에는 개연성(蓋然性)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나 관객은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그 상관관계를 인정한다. 사건들의 전개에서 에피소드까지 포함하여 독자가 공명할 수 있는 삶의 질서가 있어야 독자는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라면 작가와 주제에 호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망하다가 흥미가 줄어들고 결국 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좋은 작품이 창작되어야 시장의 과도한 관련 비유가 제어될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할 뿐만 아니라 양화도 악화를 구축한다. 나아가 허구물에서 그 개연성이 우선 보기에는 미약해 보이거나 이해할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반전 이후에 그 이유가 서서히 계시되거나 하여, 독자와 관객의 인식을 쇄신하며 감동을 유발해 향유하게 하면, 그런 언급이 남발되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랭 로브그리예(1922-2008)는 1950년대에 사건 전개에서 개연성도 고의로 무시하는 ‘반소설[누보로망(Nouveau roman)]’을 주창하였다. 현실의 부조리와 초현실주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스토리의 평범한 개연성에 염증이 나고, 선배 대가들의 눈부신 구성을 능가하기도 어려워 그 기치를 들어 올리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허구의 숨결은 개연성이고, 그 추구는 숙명이다. 봉준호 감독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에서 「기생충」으로 감독상, 작품상, 국제영화상뿐만 아니라 ‘각본상’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한다. 결코 쉽지 않은 ‘예술성과 흥행성의 융합 성취’는 그가 쓴, 여러 복선과 반전을 포함하여 정교하고 치밀하게 추구되어 재봉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각본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을 벌써 세 번이나 봤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보인다. 디테일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고, 모든 장면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어느 부분 시간 하나 계획 하나 낭비된 게 없다.    - 티모시 샬라메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가 ‘봉테일’이란 별명을 왜 달갑게 여기지 않는지 우려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 서두의 나의 그 상상에 개연성이 있다. 그것도 일상성 그것. 이 세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흔한 사례, 주차 시비로 야기된 형사 사건도 어디 한두 건인가 말이다. 작년에 병원의 일방 차로에서 젊은 운전자와 크게 다툰 적 있다. 도로 사정을 모르고 걷다가 바로 뒤에서 울린 경적의 굉음에 깜짝 놀랐고, 배려 없는 무례한 행위라고 즉각 비난하였다가, 상대로부터 상식 없다는 힐난과 욕설마저 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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